생각해보니, 학창 시절부터 나는 '엔리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축구선수인 루이스 엔리께를 좋아했던 건지, 가수인 엔리께 이글레시아스를 따라 했던 건지, 내가 왜 그 이름을 골랐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말이다. 그냥 혀 위에서 도르르르 굴러가는 'r' 음이 좋았던 것도 같다. 굳이 외국식 이름을 만들었던 이유는... 언젠가는 라틴 쪽을 여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학기가 바뀌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때 그들은 엔리께라는 이름을 듣고 외국 어디에서 살다왔는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민망함 반, 쑥스러움 반으로 멋쩍게 웃으며,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이라고 답해 주었다. 나는 스페인에 가본 적 없는 국산 엔리께라서 친구들은 나를 '리께'라 불렀다. '엔'씨 성을 가진 리께.
나중의 일이지만, 그 이름을 들고 나는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다녔다.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이름을 불렀고 나의 이름 또한 그들에게 불렸다. 우리는 바다와 하늘, 숲, 연못, 도시, 골목, 스포츠 속에서 매일이 휴일 같은 날들을 보냈다. 재미있지 않은 순간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사람과 사물, 풍경은 언제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한 장의 그림으로 내 눈 속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