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밤 11시 30분께, 팡, 팡 터지는 새해맞이 불꽃을 보며 이와이 슌지 감독의 [쏘아 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한두 방이었던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나더니 급기야 밤하늘을 온통 뒤덮었다. 꽃이 피고 진자리에는 연기가 피어올라 안개처럼 마을을 덮었다. 희뿌연 연기 속으로 일상의 고단함이 묻힌다.
과테말라의 플로레스_Flores는 꽃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호수 한가운데에 위치한 이 마을은 다리 하나로 간신히 내륙과 연결되어있는데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아마도 줄기 끝에서 피어난 꽃의 모습일 것이다. 바람 한 줌에서도 싱그러운 물의 냄새가 묻어나고 섬마을 특유의 조용함이 좋아서 나는 며칠을 여기서 쉬어가기로 했다. 특히 마을 어귀 어느 쪽을 가도 물놀이를 할 수 있다. 내가 도착한 날 오후에도 마을 청년 서너 명이 물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는데, 12월 마지막 날에 물놀이를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근사하고 사치스러운 소리인가. 식사도 하고 필요한 물건들도 살 겸 짐을 푼 뒤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더위에 지쳐 그늘에서 쉬고 있는 몇 마리의 개들만 보일 뿐 마을은 조용했다. 모든 상점들도 연말을 맞아 일찌감치 문을 닫은 듯했다. 어느 작은 가게에서 나는 겨우 와인 한 병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낮에 산 와인을 홀짝이며 호텔의 옥상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불꽃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 안의 흥분도 덩달아 피어올랐다. 흥을 못 이겨 나는 폰을 꺼냈다.
-이봐, 거기 미래는 어때?
여기는 2012년이지만 한국은 2013년. 불꽃 사진을 담은 나의 메시지가 일 년을 앞서 친구에게 전달되었다 생각하니 새삼 '시차'라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친구는 이런 것에 흥미가 없는지 답이 없다. 나는 페이스북을 켜서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글들을 본다. 이미 새해를 맞이한 이들의 알찬 '신년 계획'이 한가득. 그렇지, 이걸 동력 삼아 우리는 또 한 해를 잘 살아내겠지.
어떻게 바라보든 불꽃은 불꽃이고, 삶은 삶이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밑에서 볼 수도 있고, 옆에서 볼 수도 있다. 무덤덤하게 흘러가는 날들 속에서 가끔 추억 하나 만드는 것쯤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같다. 신년의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고 불꽃에 가슴이 설레는 일도 좋다. 오후의 더위를 잊기 위해 호수에 풍덩 뛰어드는 일도, 겨우 구한 와인 한 잔에 취해보는 것도 제법 괜찮은 방법이다. 내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이 순간을 기념한다면 어쩐지 이 세상에 '축제 없는 인생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