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엔리께 Aug 26. 2022

시베리안 횡단열차에서

《Trans-Siberian Railway, Russia》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달린다. 수십 개의 침대를 칸막이로 간신히 나눠놓은 쁠라쯔까르따_Плацката 칸에서 일곱 밤, 여덟 날. 이 여정을 마지막으로 나는 한국에 돌아간다. 바다가 얼어붙기 전 마지막으로 출항하는 배를 잡아타기 위해 나는 중간 경유 없이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토크_Vladivostok까지 가기로 했다. 속초행 배는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닌 몇 킬로 떨어진 자루비노_Zarubino에 있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지체 없이 이동해야 하므로 사실상 모든 일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끝난다고 봐야 한다. 긴 휴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나른했다. 

 한 겨울의 시베리아는 온통 눈으로 덮인 세상이었다. 오로지 눈과 앙상한 자작나무만 되풀이되는 풍경에 오늘이 며칠 짼지 서서히 헷갈리기 시작하며 기분이 몽롱해졌다. 이따금씩 옆좌석의 사람들이 다정하게 술을 권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맨 정신보다는 취한 쪽이 더 견디기 쉬워서일 거다. 한 번은 러시아 전통주를 주는 대로 받아먹었더니 거나하게 취해서 한나절을 꼬박 잠으로 보냈다. 역에서 잠깐씩 2,30분 정차를 했는데, 그럴 때 내려 빵과 치즈, 햄 같은 간단한 먹을거리를 샀다. 조금 넉넉하게 사서 옆좌석의 사람들과 나눠 먹기도 했다. 맞은편 침대에는 젊은 러시아인이 누워 나를 쳐다보았다. 연푸른 눈동자에서 젊음이 빛났다. 군인의 풍모, 몸체만 한 짐으로 보아 타지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 둘 다 집이라는 같은 종착점을 향하고 있다 생각하니 왠지 연대감이 생겨났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설렘을 누군가에게 표현하고 싶기도 했고, 기쁨을 나누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계속 마주 보고 있다 보니 말을 터놓고 지내면 같이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될 수 있겠다 싶어 몸짓을 섞어가며 얘기를 시도했지만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 후로 눈이 마주치면 어색해서 히죽 웃고 말았다.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쁠라쯔까르따에서는 몸을 뉘이면 칸막이 뒤편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의 숨이 열차 안을 뜨겁게 채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체취도 농밀해져 갔다. 깜빡이는 전구 아래서 책을 읽다 수많은 소곤댐에 취해서 잠들기도 했다. 생각과 생각이 포개져 뒤척이는 밤이면, 나는 차창 너머의 흑백 위에 되돌아보고 싶은 여행의 순간들을 써 내려갔다. 그러면 아름다운 장면들이 시베리아 평원 위에 펼쳐지곤 했다.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이 열차 안에서의 8일은 어쩌면 내 휴일을 완결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그 추억하는 시간들을 나는 음미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바로 전 역인 우수리스크_Ussuriisk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는지 열차가 도착하기 전부터 실내는 분주했다. 그럴 만도 한 게 8일간 벌려놨던 짐을 작은 가방에 다시 싸서 넣는 일은 꽤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사람들은 남은 음식을 먹어 치우기도 하고, 두터운 옷으로 갈아입기도 했다. 내 앞의 젊은 러시아인도 짐을 정리하기 시작하더니 열차가 멈추자 우수리스크 역에서 내렸다. 

 종착역을 향해 열차가 힘찬 경적을 울렸다. 열차가 속도를 붙여 역을 벗어나려는 그 순간, 플랫폼에 서 있던 젊은 러시아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비록 작별 인사하는 순간은 스쳐 지나는 몇 초에 불과했지만 길었던 내 휴일을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장면은 없을 것 같았다. 너의 머리 위 한가득 떨어지는 햇살을 두고서, 나는 이제 집으로 간다.

안녕, 러시아. 

내 휴일의 완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