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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노 Dec 19. 2024

회사는 가기 싫지만 박력은 있고 싶어

탈주할 박력

직장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월급, 승진, 휴가, 약간의 성취감, 약간의 소속감 그리고 순간순간 바뀌는 작은 비빌 언덕들.


올해가 시작되면서 나는 회사에 있는 짐을 조금씩 줄이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가볍게 퇴사할 수 있도록 말이다.


개인적으로 차곡차곡 분류해 놓은 여러 서류들을 정리하며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 했구나 찡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제 곧 나에게 필요 없을 것들이다. 나는 단호하게 세단기에 서류들을 집어넣었다. 


올해는 정말 퇴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계획도 있었다.

캐나다 유학.


정말 하고 싶은 마음은 아무리 커다란 돌로 눌러도 눌러지지 않는 것 같다. 대학 시절에 어학연수가 그렇게 가고 싶었는데 못 간 것이 이렇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줄은 몰랐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직장인이 됐고 이직 한번 없이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어서 어학연수의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딱히 불만이 있진 않았다. 오히려 만족하며 다녔던 것 같다. 돈 때문에 일하는 게 컸지만 일하지 않는 나를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별일 없으면 그냥 쪽 이 회사에 다니겠구나 그러면서 살았다.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퇴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과로했던 것 같다. 과하게 일하고 과하게 완벽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래서 번아웃과 함께 우울증이 찾아왔다. 이게 근 이,삼 년 전의 일이다.


회사를 관둘 수도 있겠구나 싶어 지자 잊고 있던 유학의 꿈이 나를 쿡쿡 찔러 대기 시작했다. 마음 속에서 계속 이런 소리가 들렸다. 너 가고 싶잖아. 그 정도면 오래 일했잖아? 일만 하다 죽을 거야?


나는 탈출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퇴직금을 계산해 보고 그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가늠했다. 캐나다 사람들이 집 구할 때 사용한다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집 렌트비를 검색하고, 학비와 생활비를 따져봤다.


구글 지도를 매일 들여다보며 살고 싶은 지역을 정했다. 내가 다닐 학교와, 딸이 다닐 학교도 알아봤다. 졸업한 고등학교를 찾아가서 영문 성적증명서와 졸업증명서도 뗐다.


마지막으로 유학 박람회에 가서 수속을 맡아줄 유학원을 결정했고, 유학원의 소개로 내가 다닐 학교의 한국인 담당자도 만나보았다. 이런 것들을 하면서 1월에서 4월을 보냈고, 5월엔 내가 입학하려고 하는 대학교에서 입학 허가서까지 받았다.


허가서를 받고 정말 기뻤다. 구글맵을 하도 들여다봐서 마치 캐나다 다녀온 것 같은 기분으로 살고 있었는데, 허가서를 받은 뒤로는 이미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이제 등록금만 내면 원하던 유학을 가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즈음 나는 회사 일에 집중 되질 않아 두서없이 휴가를 남발했다. 아마도 부서장은 뭔가 눈치를 채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든 말든 나는 캐나다로 튈 것이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마지막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 모든 계획의 동력은 나로부터 나오고 있었는데, 소극적으로 응하던 남편이 주춤한 것이다. 회사를 떠날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했다. 한국에서 이뤄놓은(?) 것을 놓고 가기에 늦은 것 같고 망할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엄마도 유학을 반대했다. 사실은 나의 퇴사를 반대한 것에 더 가깝지만, 그 나이에 공부 더 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네가 돈 많은 집 딸도 아닌데 모아놓은 거 다 털어 쓰면 그 뒤엔 어떻게 살 거냐, 등등의 이유였다.


엄마와 남편의 말이 구구절절 맞다. 약간의 부동산과 알량한 동산을 믿고 떠나려 했던 내 마음은 사실 모든 것을 걸기로 하는 결정과 다름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이 문제였다. 한국에서 남편과 내가 직장을 다니는 한 우리 가족은 적당히 풍족할 것이다. 그래서 놓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내가 가진 것을 손에 쥐고 저울질하다가 등록금 납입 시기를 보내 버렸고 유학은 없던 일이 됐다.


그리고 언제 그런 꿈을 꿨냐는 듯이 출퇴근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헐. 나 참 의연하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본다. 나는 언제 행복한가. 나는 무엇이 하고 싶은가. 나는 내 인생에 어떤 목적을 부여할 것인가.


방탄소년단의 리더인 남준이의 솔로앨범 indigo의 첫 번째 트랙 Yun에서 윤형근 화백은 이렇게 말했다.



평생 진리에 살다 가야 한다 이거야.
플라톤의 인문학에서는 인간의 본질인데,...진선미
진실하다는 '진'자하고, 착할 '선'자하고, 아름다울 '미'인데,
내 생각에는 진 하나만 가지면 다 해결되는 것 같아



나는 윤형근 화백처럼 평생 진리에 살겠다는 거창한 신념을 가지지 못한다. 진실된 내 마음을 알고 싶을 뿐이다. 진실을 향해 나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가고 싶을 뿐이다.


그러면서 물 밑으로 가라앉고 싶지 않다. 언제나 막 타놓은 컵 속의 미숫가루처럼 둥둥 떠서 회오리 치고 싶다. 안주하지 않고 싶다. 안정만을 추구하기 싫다. 그러나 나는 결국 안주를 택했다.


올여름에 유럽 여행을 하면서 뜻하지 않게 공황 증상을 겪었다. 낯선 나라에서 응급실을 찾아가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 나서야 안정을 찾았었다.


그 일을 겪으며 처음에는 막연히 무섭기만 했다. 아.. 나는 이제 낯선 곳에서 살 수 없겠구나. 공황이 또 오면 어떻게 하나.


네 달이 지난 지금은 또 다르다. 여행을 자주 다니면 유학의 꿈이 접어질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아마도 나는 여전히 가고 싶은가 보다.


정말 늦었나? 이 안정적인 생활을 버릴 용기가 있나? 아직인가 아니면 바로 그때인가 전히 모르겠다. 내 마음이 이렇게 갈팡질팡이니 남편도 부모님도 설득하지 못하나 보다.




퇴사할 거니까 절대 사무실 책상에 짐을 들이지 말자던 올해 다짐을 처음으로 깨고 스타벅스 무드등을 가져다 두었다. 전원을 켜니 무드등의 평화로운 곡선이 노란빛으로 마음을 녹인다. 그래... 언제까지 머무를지 모르더라도 아늑한 곡선의 세계에서 버텨보자.



그렇지?
너 탈주할 박력 있는 종자는 아니잖아.
(영화 '탈주'의 대사)



내년엔 새로운 삶이 펼쳐질까. 과연..

아무것도 새롭지 않을 것이란 걸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과연 나는 탈주할 수 있는 박력 있는 종자일까?



오늘의 출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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