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이십 년 전에는 현재 광화문 LG 빌딩 자리에 작은 음식점이 오밀조밀 몰려 있었다. 라면집, 중국집, 카레집, 백반집...
그중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카레집이 있었다. 그 카레집은 의자와 테이블이 통나무로 되어 있고, 테이블마다 파티션이 나눠져 있어서 옛날 호프집 같은 모습이었다.
재밌는 건 사장님이 깍두기를 꼭 세 개씩만 줬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카레집에 가서 카레를 두 개 시켰는데 깍두기를 세 개만 준다고 생각해 보시라. 보통의 작은 깍두기는 아니었고 좀 커다란 깍두기이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세 개는 경쟁이 너무 치열하잖아?
카레를 먹을 때면 여기저기서 사장님 깍두기 좀 더 주세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사장님은 경영 철학을 바꾸지 않고 문을 닫는 그날까지 깍두기 세 개 정책을 유지하셨다. 그 집 맛있었는데, 그립다.
이제 광화문 지하철역 쪽으로 걸어 내려와 KMI 건강 검진 센터 건물 지하로 내려가 석정이라는 오징어볶음집으로 가보자. 겉으로 보면 평범한 지하 상가 식당인데 내 기준 맛집이다.
오징어 야채 볶음을 시키면 미역국과 단출한 반찬에, 고춧가루가 양념된 콩나물과, 오징어, 양파가 잔뜩 올려진 냄비를 가져다 준다. 맛있게 자극적인 맛? 아귀 없는 아귀찜 맛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곳에 가면 어마어마한 양의 탄수화물을 먹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오징어 볶음이 끊임없이 공깃밥을 부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신은 공깃밥을 다 먹고 볶음밥도 먹게 되어 있다. 양념되지 않은 김에 볶음밥을 싸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오랜만에 한번 가야겠다.
당시 이 건물 지하에 당구장도 있었는데 여전히 있나 모르겠다. 신입 사원 때 석정에서 밥을 먹고 나가는 길에 당구장 내부를 본 적이 있는데 우리 회사 부장님들이 당구를 치고 있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아저씨처럼 보이고 쓸데없어 보이고 불량해 보인다고까지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 부장님들을 이해한다. 그분들에게는 재빠르게 밥을 먹고 짧게 당구를 치는 시간이 나머지 오후를 버티게 해주는 비빌 언덕이었던 것이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백반이라는 것을 사 먹어 본 내가 세상을 얼마나 알았을까. 고등학생 때까지는 밖에서 먹어봐야 분식, 돈가스, 햄버거 정도였다. 남의 집 밥을 먹어본 경험이 거의 없던 나는 엄마가 담은 김치가 아니면 입에도 못 대는 경기도 깍쟁이로 자라났다.
직장인이 되고서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참치, 해산물, 청국장, 순댓국, 육회, 굴... 이 음식들은 학생 시절 내가 먹기에 뭐랄까 너무 어른의 음식처럼 느껴졌다.
그랬던 내가 강된장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광화문역 근처 로얄 빌딩 지하에 있는 깡장집 덕분이다.
깡장집에서는 강된장 비빔밥 같은 걸 팔았다. 작은 뚝배기에 자작한 강된장이 나오면 야채가 담겨 있는 비빔밥 그릇에 강된장을 넣고 비벼 먹었다. 냄새가 심하므로 먹으면서 대화는 많이 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게 깡장집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그래도 그땐 다 괜찮게 느껴졌다. 사무실에 들어와서 서둘러 양치를 하고 온몸에 페브리즈를 뿌리면 됐으니까.
지금은 혼자 먹는 도시락 주먹밥이 제일 좋은데,
나도 오늘 점심엔 뭐 먹지?가 중요할 때가 있었다는 게 가끔 신기하다.
어느 월요일엔 광화문 오피시아 건물 지하에 있는 '중화'(현재는 진아춘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중)라는 중국집에서 파는 따끈하고 바삭한 탕수육을 떠올렸다. 중국 요리도 안 좋아하는데! 탕수육 고기에 얹어주는 오이와 목이버섯과 파인애플이 아른아른.
화요일엔 서울 역사 박물관 뒤편의 '아데쏘'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카르보나라를 떠올리기도 했다. 반드시 크림 소스를 많이 달라고 할 거다. 찐덕한 소스에 마늘 빵을 찍어 먹으면 그곳이 천국.
수요일엔 경희궁의 아침 근처 '테이엔'이라는 벤또집에서 파는 얼큰한 나가사끼 짬뽕이 먹고 싶었다. 넉넉한 숙주 먼저 아삭아삭 씹어 먹고 조개랑 홍합살 발라먹으며 빨간 국물을 후루룩할 수만 있다면.
목요일엔 광화문 오피시아 건물 지하에 있는 '광화문 수제비'를 떠올렸다. 맛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수제비는 우리 엄마가 해주는 게 제일 맛있다며 별 기대를 안 했었다. 그러나 국물을 한 입 맛본 순간..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젤 맛있는 수제비 요리사의 지위를 잃었었지.
금요일엔 정동길에 있는 '라그린'에 가서 아보카도 파니니를 먹고 싶었다. 이 아보카도 생모짜렐라 파니니가 어떤 맛이냐면, 장인이 한 땀 한 땀 아보카도, 생모짜렐라, 훈제 햄을 포개 넣고 맛있는 기름을 잔뜩 발라서 따끈하게 구워준 맛이다. 한 입 깨물었을 때 바삭! 소리와 고소한 기름 냄새, 늘어나는 모짜렐라와 부드러운 아보카도, 짭조름한 훈제 햄의 맛이란? 말해 뭐 해. 이것은 그저 살찌는 맛.
이런 생각을 하며 출근하고 다녔다니 꼭 전생같이 느껴진다.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덜 컸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집 밥 밖에 못 먹던 내가 밖에서 먹는 음식을 보니 이젠 크긴(늙긴) 했나 보다.
이 글을 쓴다고 오랫동안 가지 않던 식당을 떠올리며 한 곳씩 검색해 보았다. 여전히 남아 있는 식당을 발견하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너도 나처럼 좋은 날과 힘든 날이 있었을 텐데 버텼구나. 우린 같이 버틴거야. 내 입사 첫날의 점심 시간부터, 회사를 싫어하는 20년차 직장인이 된 오늘의 점심 시간까지.
그리고 사람에게도 고마웠다.
처음으로 비싼스시 뷔페에 데려가 준 과장님.
그 짧은 시간에 택시를 타고 삼청동으로, 인사동으로, 남대문으로 맛집에 데리고 다녔던 차장님.
혼자 남아서 밥을 안 먹고 있으면 좋아하는 샌드위치가 뭐냐며 묻고 사다 준 대리님.
그분들이 있어서 나는 잘 먹으며 신입 사원 시절을 보냈다.
회사 가기 싫은 마음을 쓰려고 왔는데, 맛있는 밥과 함께 고마운 사람들이 생각나서 오늘은 회사가 싫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