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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노 Dec 12. 2024

회사는 가기 싫지만 응원봉은 챙겨야 해

응원봉 대통합의 시대

나는 보통 7시 즈음 출근하러 집을 나선다. 요즘 이 시간은 아직 어스름해서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고만 싶어 진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광화문으로 가야 하지.


이런 마음을 달래 주러 오랜만에 사운드 클라우드에 접속했다. 어스름한 아침 공기가 방탄소년단의 RM과 V가 부른 '네시'라는 곡을 듣고 싶게 했기 때문이다.


이 곡은 방탄의 숨겨진 명곡인데 사람들이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 멜론 같은 음원 사이트 말고 유튜브나 사운드 클라우드라는 무료 음원 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다.


어느 날 달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썼어
너보다 환하진 않지만
작은 촛불을 켰어
방탄소년단 RM&V '네시'


12월 3일 이후 나는 덕질을 멈추고 있다. 덕질만 멈춘 게 아니라 독서도 멈췄고 음악 감상도 멈췄다. 제일 하고 싶은 건 그냥 집에서 뒹굴거리는 거지만, 제일 해야 하는 건 집회에 나가는 일인 것 같다.


어제 퇴근하면서 정청래 의원이 법사위 전체 회의에서 소녀 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의 가사를 읊으며 울컥하는 장면을 봤다. 첫 소절을 읊을 때는 나도 모르게 픽. 웃었는데 나중엔 같이 울컥했다.


정청래 의원은 '청년들의 미래를 개척해야 할 어른들이 헌법도 어기고 계엄군을 동원해서 사람들의 생명을 도륙하려 했던 그 분노, 살 떨리는 노여움까지 대한민국 청년들은 희망으로 승화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뉴스를 보면, 화내고 욕하고 계란과 밀가루를 투척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응원봉을 들고 센스 있는 문구의 깃발을 펄럭이며 집회를 이끄는 청년들이 많아 보인다. 나는 7일 낮 집회에 참석해서 잘 못봤는데, 밤의 풍경을 보니 응원봉이 정말 많았다.


덕후들에게 응원봉은 어떤 의미일까.

덕후들에게 응원봉은 자신이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가장 빛나는 무엇이다. 그들 믿는 소중한 가치를 빛내주는 무엇이다.


내 경우도 방탄소년단의 응원봉인 아미밤을 얼마나 소중히 보관하는지 모른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깨끗이 닦아서(애초에 더러워질 일이 없음) 아미밤 보관용 파우치에 1차로 넣은 뒤에 아미밤용 케이스에 2차로 넣어서 덕질 서에 고이 넣어둔다.


아마 다른 덕후들도 적어도 2번의 포장을 거쳐 보관한 소중하고 빛나는 응원봉을 꺼내서 집회에 들고 나온 것이리라.


덕후들이 오죽하면 응원봉을 들고 나올까 싶다. 덕후들은 예(?)로부터 본인 연예인이 정치에 휘말리는 걸 극도로 꺼리기로 유명하다. 우리끼리는 절대로 정치적인 자리에 응원봉을 가지고 나가지 않다는 암묵적인 합의 같은 게 있다.


그런 덕후들이 용기 있게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번에 더 놀란 것은 것은 덕후끼리 응원봉을 모으며 대통합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덕질을 하다 보면 타 팬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머리채를 잡고 물어뜯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사이좋은 팬덤도 있지만, 어떤 상을 두고 경쟁하거나, 음원 사이트 순위를 두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오해들로 서로 말조차 섞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다. 누구도 주도적으로 그런 문제를 풀려고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팬덤 대통합은 진정 요원한 일이었다.


그런 덕후들이 서로의 응원봉을 모으며 통합한다? 정청래 의원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여러 응원봉이 함께 찍힌 사진을 보며 울컥했다.


한강 작가님이 노벨 문학상 수상기념 강연에서 말씀하신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는 문장처럼, 고통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여러 팬덤 이름을 다 적으면서 아름답다고 쓰고 싶은데, 아는 게 방탄소년단 팬클럽 아미 밖에 없어서 아미만 적고 있다. 아미는 아름다워. 덕후들이여, 여러분은 용감하고 아름다워요.


오늘도 난 적당히 살아가
발맞춰 적당히 닳아가
태양은 숨이 막히고
세상은 날 발가벗겨놔
난 어쩔 수 없이 별 수 없이
달빛 아래 흩어진 나를 줍고 있어
방탄소년단 RM&V '네시'


적당히 살아가며 적당히 닳아가던 우리를 하나로 모은 이 소용돌이가 끝나는 날까지 아마도 덕후들은 제 몫을 톡톡히 할 것이다. 어디선가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내면서 집회에도 참석하는 모든 덕후들 만세 만세 만만세!


오늘의 출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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