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겨울이 왔다. 오늘은 도톰한 정장 바지를 꺼내 입었다. 다리 통과 밑단 전체가 넓은 와이드 팬츠인데 그 길이와 허리 둘레가 완벽하게 내 하체와 일치해서 나에게 사랑받는 아이이다.
상의에는 골지 니트로 된 검은색 터틀넥을 입었고, 여기에 롱코트만 입고 싶었지만 추울 것 같아서 구스가 들어간 경량 패딩을 코트 안에 입어줬다. 경량 패딩 짱. 너무 따뜻하다.
신발은 티바라는 이름이 붙은 6cm짜리 에나멜 펌프스를 신었다. 티바는 그냥 구두가 아니다. 꼭 사랑하는 나의 최애 구두라고 말해야 한다. 이 구두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이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이 구두를 꼭 가져야 했다. 하지만 235cm 내 사이즈가 품절이었다. 240cm도, 245cm도 품절이었다.
결국 나는 이 구두가 갖고 싶어서 235cm인 내 발을 255cm인 이 펌프스에 넣고 다니기로 결정했다. 걸을 때마다 헐떡이지 않냐고? 그렇다 헐떡인다. 그러나 발등 위로 영어 T자 모양 스트랩이 있는 디자인이라 생각만큼 불편하지 않다. 정말이다.
이렇게 오늘의 출근룩 완성.
어제 문득, 글을 쓸 정도로 패션에 민감하거나 아는 게 많지 않지만, '회사 가기 싫다'는 생각만큼 '내일 뭐 입지?'라는 생각도 많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패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내가 입는 옷에 대해서는 예민한 사람이 아닐까.
한 예로, 마음에 드는 패딩을 못 찾아서 몇 년째 같은 패딩을 입고 있다. 패딩은 사서 오래 입는 게 국룰이지만, 그 패딩은 이미 정상의 기한을 넘긴 지 오래였다.
벨트가 있는 패딩은 출근룩으로는 좋은데 주말에 입기 불편하고, 모자에 털이 붙은 패딩은 화려해서 싫고, 그 털이 동물의 진짜 털인 경우엔 동물 보호 차원에서 더더욱 싫다(패딩 자체가 구스 털로 채워졌을 확률이 높다는 것은 애써 외면).
허리가 너무 잘록해도 너무 일자로 밋밋해도 안된다. 불룩 불룩하게 패딩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도 싫다. 패딩 표면은 그냥 평온한 민짜였으면 좋겠다. 이런 여러 가지 조건 덕분에 헌 패딩만 열일 중인 것이다.
그런데 헌 패딩을 새로 꺼내 입으면 또 입을만하다는 게 신기하다. 내 패딩이 헌것인지 새것인지 누가 신경이나 쓸까 생각하면 옷에 쓰는 정성이 쓸데없게 느껴진다. 그렇게 한 철을 보내고 패딩의 계절이 돌아오면 또다시 맘에 드는 패딩을 찾아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 것이다.
출근하기는 그렇게 싫다면서 나는 왜 잘 차려입고 싶을까. 사람이 싫다면서도 사람이 그리운 마음과 관련이 있을까? 오늘도 출근하기는 싫지만 옷은 잘 차려입고 싶고, 사람이 싫으면서 사람이 그리운 모순된 마음들을 가슴에 품은 채 하루를 보냈다.
이 평범한 하루를 마치는 데는 여전히 아빌리파이와 라믹탈, 자나팜과 인데놀이 필요했지만, 몇 알의 약 덕분에 불안과 우울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6cm짜리 티바 펌프스와 네이비색 코트가 불안과 우울을 잠재우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