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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ietto Aug 06. 2020

엄마, 아빠 다 큰 딸이 미안해요.

 딸 둘에 아들 하나, 거기에 서열 두 번째인 둘째 딸로 자라서인지 몰라도 이상하게 유년 시절에 부모님의 사랑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끔 했었다. 언니는 첫째니깐 풍족한 사랑을 받고 셋째는 아들이니깐 귀한 사랑을 받고 난 어디 주워 온 자식 아니냐는 그런 소리를 학창 시절에 일기장에 적었었나 보다. 학부모 상담을 하고 돌아온 어느 저녁 엄마는 진지하게 물으셨다.

 

"일기장에 그런 이야기는 왜 적는 거냐? 선생님 오해하시게"


허참, 담임선생님께서 일기장 내용을 발설하신 게다. 분명 선생님과 나 사이의 비밀 일기장이었는데.


나의 그런 하찮은 생각들은 커가면서 무뎌지고 사라지며 점점 존재를 감추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꽃다운 나이 32살, 시집 간지 반년 만에 갑상선 암에 걸리고 말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미 암이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피막을 뚫고 나와 주변 림프절에도 전이가 되었다.


 딸내미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신 이후부터 아빠는 야위어져 가셨다. 세상에서 제일 단단하고 커 보였던 아빠가 말이다. 수술 날짜가 잡히지 않았던 며칠 동안은 식사도 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자식이 아프면 그게 부모에게 불효라더니 그 말이 딱 맞다. 기어코 대학병원 검사에 따라오시겠다는 엄마를 말리지 못한 그날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눈물을 얼마나 삼켰는지 모른다.


 엄마는 퇴원 후 친정에 있는 한 달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려고 하셨다. 삼시세끼 영양소가 고루고루 섞인 밥을 차려주셨고, 해가 지고 저녁쯤이 되면 나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 함께 운동을 했다. 평소보다 더 자주 시장엘 가셨고 몸에 좋다는 식재료들은 몽땅 사 오시는 듯했다.  어느 날은 갑상선에 복숭아가 좋다며 복숭아 한 박스를 사 오시고 또 어느 날은 전복을 먹어야 한다며 전복을 사 오셔서 손수 요리해주셨다. 엄마는 단연코 내가 아는 최고의 보양식 맛집 요리사다. 가끔 컨디션 난조로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해 보이는 기색을 보이면 그것보다 10배 20배는 더 걱정을 하셨다. 엄마의 시간은 그렇게 나에게 오롯이 맞춰져 있었다.


"엄마 힘들지 않나? 그만 앉아 쉬어라."

"뭐 힘드노 이게, 실렁실렁 하는 건데. 별 걱정을 다 한다. 뭐 더 먹고 싶은 건 없나?"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더 먹여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조금 늦게 알아버렸다. 참 못난 고백이지만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데 들이는 정성은 어느 정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때가 되면 용돈을 드리고 필요한 게 있을 땐 알아서 척척 사드리는 내가 참 효도를 잘하고 있다고 오만했었다.


 친정에 있는 동안 엄마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대학 입학 이후로는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했고, 직장 생활 역시 저 먼 곳에서 자취를 했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시집을 갔다. 그러다 보니 어른이 되고 난 후부터는 엄마와 사사로이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할 기회가 잘 없었다. 엄마는 수다쟁이였다. 함께 있는 긴 시간 동안 우리가 제일 많이 했던 건 수다였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이야기는 어쩌다 새벽까지 이어져 내일을 위해 잠시 접어두기도 했었다. 엄마와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는 늘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


 '엄마의 시간은 이랬구나. 나는 여태껏 엄마의 흘러간 시간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구나.'


 아마도 부모님에게 더 필요했던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내 시간과 내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치열하게 살아왔던 80년대, 우리 부모님 역시 삼 남매를 키우시느라 또 삼촌과 고모 뒷바라지하느라 눈물 나는 고생을 하셨다. 지금은 웃으면서 라떼는 말이야~라고 이야기하시지만 라떼의 엄마는 고작 지금의 내 나이였다. 30대의 엄마가 짊어졌을 무게가 감히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엄마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어줄 수 있어서. 앞으로의 시간은 엄마를 위해 조금 더 많이 쓰도록 노력하며 살아야겠다. 그리고 쑥스럽지만 한 번씩 힘들었을 엄마를 꼬옥 안아도 드려야겠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던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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