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욱 Oct 17. 2024

첫울음과 조종(弔鐘) 소리

유튜브 동영상에서 소설의 새로운 형식을 모색한 작업

앤드루로보틱스 신상품 상상 초월 언박싱 

조회수 12만회 · 하루 전 

æ 의식의 빨래          

  

화면 안으로 멀리 창경궁이 내려다 보인다. 촬영 장소는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다세대 주택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집들은 경사진 골목에 박혀 삐딱해 보인다. 낙산공원을 넘어온 바람이 보도블록 틈에 뿌리 내린 야생화를 흔들어 댄다. 그림자가 길게 눕는 해 질 녘 바람은 집을 타고 오른다. 베란다 창틀에 걸린 풍경이 흔들린다. 티 없이 맑은 종소리가 이어지며 시작을 알린다. 카메라가 뒤돌아 거실을 보여주는 동안에도 종은 계속 울린다. 탄력 없는 긴 생머리에 머리띠를 하고 주름이 들어간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은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유튜버가 3인용 소파에 앉아있다. 식탁에는 샴페인과 잔 그리고 하늘색 리본을 두른 케이크 상자가 있고 그 옆으로 사과 상자만 한 박스가 놓여있다. 카메라가 그 박스를 끌어당긴다. 제법 무게가 나갈 것 같은 단단해 보이는 골판지박스다.          


-삼겹살 구워 먹기 딱 좋은 집이네요.

-오랜만이에요. 친구에게 구독 추천했어요.

-저런 풍경 어디서 파나요?

-울어줘, 울어줘~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작업실 유지하기 힘들어 정리하고 집에서 언박싱 콘텐츠로 갈아탔는데 드디어 로봇 회사에서 협찬이 들어왔어요. 이 대목에서 눈물 한 방울 흘려줘야 하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아요. 카메라에 들이대 볼게요. 눈물 호수에 빠지지 마세요. 이런, 눈물이 글썽거리기만 할 뿐 흘러내리지는 않네요. 긴장돼서 그러나 봐요. 나도 박스 안에 어떤 상품이 들었는지 정확히 모르거든요. 앤드루로보틱스에서 협찬하면서 생방송으로 개봉하면 일 년 동안 고정 광고 준다는 조건이었죠. 아마 크기로 봐서는 깜짝한 반려 로봇이 아닐까요? 뭐라고요. 성인용품이요. 설마 아니겠지요. 혹시 괴물 로봇이 등장해서 우리를 잡아먹는다면 방송이 중단될 수도 있어요.           

  

[광고 건너뛰기] 우리 아기를 기록한 그림일기책 

“우리 아기 너무 예쁘지요?”

노트를 보던 화장기 없는 젊은 여자들이 고개를 든다. 수심이 가득한 표정들이다. 무엇 때문일까? 장면이 바뀌어 단발머리의 삼십 대 후반의 여자가 어느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다. 벽면 선반에는 색종이, 컬러 펜, 색실, 리본, 제본기 등이 수납되어 있다. 여자는 가방에서 사진을 꺼낸다. 여자와 닮은 갓난아이 사진이다. 여자는 사진을 설명하며 활짝 웃는다. 마주 앉은 공방의 주인은 사진을 붙이고 그림을 그릴 양장제본 노트와 장식 재료를 준비해 주고 손때 묻은 노트를 살며시 책상에 올려놓고 사라진다. 갓난아이의 사진을 늘어놓던 여자는 낡은 노트를 발견한다. 노트를 펼쳐 보는 여자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진다. 노트를 덮고 잠시 생각에 잠긴 여자의 표정이 밝아진다. 여자는 자기 아기 그림 일기 책을 만든 다음 하늘색 상자에서 어느 갓난아이의 사진과 민간 입양업체의 기록 일지를 꺼낸다. 입양 대기 아기의 탄생부터 입양을 기록한 사진들이다. 여자는 노트에 사진을 붙이고 기록 내용을 옮기고 응원의 메시지를 적어 넣는다. 여자의 손에 의해 입양을 기다리는 시간이 밝게 기록되는 순간 사진 속 친부모와 헤어진 아기의 표정이 마법처럼 밝게 처리된다.

 “이제 아기는 혼자가 아닙니다.”

앨범을 덮은 화장기 없는 젊은 여자가 고개를 든다. 밝은 표정으로 앨범을 가슴에 품는다. 

 

[동영상이 5초 후에 시작합니다]          

생방송은 처음이라 긴장되어 정신이 없네요. 채팅 창에 올라오는 질문에 일일이 답변을 못 할지도 몰라요. 구독, 댓글, 좋아요, 알람 부탁드려요. 언박싱을 시작한 계기가 있어요. 눈물이 고갈되어 ‘의식의 빨래’를 진행하기 어려워진 것도 있지만 코로나19 비대면 시절에 드로잉 수업을 줌으로 진행하면서 느낀 점이 있어서예요. 카메라 거실 벽에 붙은 드로잉 작품들 훑어주세요. 목탄과 오일 파스텔로 그린 작품들인데요, 추상화 같지만, 식물을 그린 것이에요, 휘갈긴 선들이 마치 팔과 다리를 유려하게 뻗어 만들어내는 발레의 동작 같지 않나요? 드로잉 수업을 줌으로 접속하다 보니 계속 뭔가 허전했어요. 잠깐 박스를 한번 안아 볼게요, 어느 날 드로잉 숙제가 담긴 박스를 안고 쓰다듬으면서 생각했어요, 비대면에 접촉의 요소를 추가하기로 말이죠. 택배를 이용하여 과제를 담은 박스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박스 안에 소통의 온기를 담아 보았어요. 줌의 화면과 마이크 소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촉각을 통한 접촉을 시도했어요. 메시지를 손 글씨 편지로 전달하기도 했고, 숲을 담은 향수를 뿌리기도 했고 수강생의 작품에 관한 피드백을 줌에서 말로 설명하지 않고 그림으로 표현하여 박스에 담아 보내기도 했죠. 드로잉 선이 하얀 종이를 긁고 지나간 자국을 서로 만져 보고 느낌을 표현하는 게 좋았어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과제가 들어 있는 박스를 개봉하는 기대감에 에너지가 충전됐어요. 수강생 모두 자기 반려 식물을 모델로 그렸는데 작품을 보면 화초의 잎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매일 정성스럽게 닦는 듯한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반려 식물에 관한 내용은 아래의 바로가기 링크로 들어가서 감상하세요.          



접속에 온기를 담아 접촉으로

조회수 9만회 · 1년 전 

æ 의식의 빨래

     

어느 골목 상가건물 2층. 15평 규모의 사무실엔 가구가 단출하다. 일인용 소파와 테이블로 쓰는 2인용 식탁 그리고 파티션 틈으로 보이는 잡다한 종이상자들이 전부다. 창가 쪽으로는 털북숭이 같거나 바늘이 빼곡히 솟은 선인장 화분이 빈틈없이 서 있다. 맨 앞에 놓인 맥주병만 한 선인장 화분이 클로즈업된다. 붓질한 듯 차분한 녹색이 매력적인 유포르비아에 빨간 목도리를 둘러서 크리스마스트리 같다. 화면에 등장한 그녀는 커튼을 치고 국부 조명을 켠다. 식탁엔 택배로 받은 박스가 놓여있다.      

숙제가 하나둘씩 도착하고 있어요. 어제 도착한 숙제 박스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분은 숙제로 선인장을 그렸는데 형태가 과장돼서 마치 캐릭터 디자인을 한 것 같아요. 박스에는 선인장 그림과 함께 모델인 선인장 함께 들어있었어요. 기하학적 형태의 가시가 매력적인 무륜주 선인장이었는데 손뜨개 목도리를 두르고 있어서 외계인인 줄 알았어요. 어찌나 귀엽던지요. 선인장이 촉각의 온기를 전달하는 매체로 활용되었어요. 그럼 개봉해 볼까요. 반려 식물의 화분을 보낼 때는 포장에 신경 써 주세요. 화분의 흙이 떨어지지 않도록 비닐로 싸고 박스에도 위, 아래 표시 확실히 하시고요.      

 그녀는 손으로 박스를 개봉한다. 옆구리를 눌러 테이프를 분리하고 손가락으로 테이프를 잡아당긴다. 주소가 적힌 택배 스티커 옆에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다. 박스 안에서 나온 것은 에어캡에 싸인 선인장 화분과 도화지를 둥글게 말은 뭉치다. 그녀는 가위로 에어캡의 끝을 자른 다음 붕대를 풀 듯이 에어캡을 벗긴다.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것 같은 팔뚝만 한 선인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인장에는 종이를 리본처럼 접은 편지가 달려있다. 그녀는 리본을 펴서 편지를 읽고 다시 그대로 접어 선인장 가시에 꽂는다.      

이 선인장은 존재감이 대단해요. 항상 시선을 사로잡을 것 같아요. 사람들은 선인장을 감상만 할 뿐 잘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선인장은 해도 많이 봐야 하고 환기도 잘 돼야 해요. 관심을 줘야 봄, 가을에 꽃을 피운답니다. 

그녀는 방금 개봉한 선인장 화분을 창가에 가져다 놓고 나서 선인장을 잠시 바라본다. 이번에는 박스에서 꺼낸 도화지 뭉치를 편다. 바닥에 여섯 장의 도화지를 늘어놓고 드로잉을 바라본다. 용수철 같은 거친 선이 끝없이 이어지는 드로잉이다. 퍼즐을 맞추듯 여섯 장의 도화지를 이리저리 옮겨본다. 카메라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드로잉을 훑는다. 드디어 퍼즐이 맞춰진다. 여섯 장이 제대로 맞춰진 그림은 선인장과 사람의 얼굴이 겹친 이미지다. 선인장의 가시와 얼굴의 윤곽을 표현하기 위해 날카로운 것으로 긁은 듯한 선들은 강렬하다. 그녀는 여섯 장의 그림을 벽에 붙인 다음 마룻바닥에 앉아 고개를 숙인다. 커다란 초상화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이다. 몸에 달라붙은 살색 원피스를 입고 동그랗게 웅크린 모습이 커다란 알 같다. 어미의 품에 있어야 하는 알이 춥고 어두운 땅에 홀로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슬퍼서 부화할 수 없는 알. 그녀는 웅크린 채 가만히 있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조금씩 내뱉고 나서는 천천히 일어난다.      

이젠 정말 눈물이 안 나오네요. 다 쏟아냈나 봐요. 아마 저 그림 때문인 것 같아요. 선인장 형상에 자기 얼굴을 겹쳐놓은 이미지의 메시지가 가슴에 와닿았어요.          

  



앤드루로보틱스 신상품 상상 초월 언박싱 

조회수 12만 회 · 하루 전 

æ 의식의 빨래

          

제법 무게가 나갈 것 같은 단단해 보이는 골판지박스를 보여주던 카메라가 뒤로 빠진다. 하얀 리넨 셔츠에 짧은 곱슬머리의 젊은 사내가 화면에 들어온다. 그는 알 없는 뿔테 안경을 쓰고 수줍은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본다. 그는 소파 가장자리에 앉아있다가 그녀 옆에 붙어 앉는다.          

소개할게요. 일 년 전 비대면 접촉을 통해 만난 남자 친구 홈키파예요. 접촉으로 온기를 주고받다가 만나게 됐어요. 요즘은 내 집에서 계속 접촉 중이에요. 벽에 걸린 드로잉의 주인공이기도 해요. 자 인사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귀엽죠? 인사 한마디 해야지? 저 안면홍조 보이세요? 홈키파 씨는 수줍음을 많이 타요.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돼서 어리어리해요. 그럼, 시작할게요. 잠시만요 이것들은 내려놓았다가 개봉 후에 먹어야겠어요. 홈키파 씨 샴페인과 잔이 넘어지지 않게 케이크 상자 옆에 잘 두세요. 아이참, 움직일 때마다 원피스 치맛자락이 올라가네요. 요즘 살이 쪄서 그런가 봐요. 

앗 잠깐, 홈키파 씨 칼, 개봉금지네요. 칼 이리 주세요. 칼을 뒤집어 등으로 배를 가를 거예요. 이럴 땐 꼭 수술하는 느낌입니다. 칼끝으로 테이프를 단번에 긋겠습니다. 그다음 손가락을 벌어진 틈에 집어넣고 이렇게, 테이프가 질기네요. 이럴 땐 덮개를 잡아당기지 말고 칼로 테이프가 시작되는 모서리를 잘라주세요. 박스가 손상되지 말아야 해요. 반품할 수도 있고 재질이 좋아서 수납용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우아, 안에 또 포장이 있네요. 내용물은 살색의 횡격막 같은 실리콘 껍질에 싸여있습니다. 진공포장처럼 달라붙어 내용물의 윤곽이 보여요. 이게 뭘까요? 둥근 것이 늙은 호박 같기도 하고, 포장을 눌러 볼까요. 어, 물컹하네요. 바비큐 고깃덩어리 같기도 해요. 오늘은 먹방 찍을지도 모르겠네요. 무게가 제법 나가네요. 홈키파 씨는 덩어리 밑에 있던 설명서와 작은 상자들을 꺼내서 확인해 주세요. 설명서 책자도 두꺼워요. 내용을 잘 읽어 주세요. 실리콘 껍질에 칼을 잘못 댔다간 안에서 뭐가 뿜어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갑자기 허기가 지네요. 로봇 회사에서 보낸 거니까 먹는 것은 아니겠죠. 자 그럼 가위로 덩어리의 포장 모서리를 조금 잘라 볼게요. 흘러나오는 투명 액체는 뭘까요, 한쪽 가위 날을 넣어 끌까지 자를게요, 자른다, 흘러나오는 투명 액체는 걸쭉해요. 냄새를 한번 맡아볼까요, 아무 냄새가 없어요. 소독제 같아요. 자 그럼, 여기 끝을 잡고 쏟아 볼까요, 잠깐, 잠깐만 준비할 게 있어. 뭐지? 홈키파 씨가 무릎 담요와 수건을 가지고 왔어요, 뭔가 굉장한 게 등장할 것 같아요. 테이블에 담요를 깔고 수건을 펼칠 테니까 그 위에 쏟아. 궁금해 죽겠어요, 자 그럼, 과연 정체가 뭔지 쏟아 볼까요.           


-오늘 원피스 참 예쁘네요.

-내 눈은 못 속여, 임신했네. 임신했어.

-7개월.

-그래서 피부가 안 좋은가.

-축하합니다.          

  

[광고 건너뛰기] 산길을 따라 들어가면 통나무집이 나타난다.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작은 수영장이 있고 주변의 나무들은 주변의 시선을 차단한다. 나뭇잎을 통과한 햇살이 수면에 반사되고 카메라를 따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굴러간다. 테라스에 숯불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릴 자국이 선명한 스테이크를 뒤집는 아빠는 아이들을 부른다. 산길을 따라 내려오면 펼쳐지는 제주의 바닷가 카페에서 가족은 브런치를 먹는다. 당근 주스와 신선한 샐러드의 연둣빛이 리조트 본관 정원의 청록빛으로 이어진다. 가족은 명상홀에서 요가를 시작한다. 전면 창으로 제주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지고 드론 카메라로 잡은 리조트의 전경이 점점 작아지며 가족사진의 배경이 된다.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이 리조트 로고로 바뀐다. 

  

[동영상이 5초 후에 시작합니다]          

화면이 흔들린다. 기울었던 카메라가 수평을 잡는다. 화면에 등장한 것은, 탯줄을 그대로 매단 신생아 로봇이다. 몸에 범벅되어 있던 젤 같은 액체가 수증기가 되어 날아간다. 발포 고무를 댄 뼈대에 입힌 실리콘 피부가 부풀어 오르며 핑크빛으로 변한다. 그 누구의 아이도 될 수 있을 듯한 평범한 인상의 로봇이다. 그녀는 수건으로 감싼 아기를 쓰다듬는다. 아이가 시계의 알람처럼 첫울음을 터트린다. 새끼손가락만 한 아기의 성기가 살짝 곧추선다. 그녀와 사내는 온몸이 굳어 꼼짝할 수가 없다. 창밖에는 세찬 바람이 분다. 흔들리던 풍경이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바람이 끊이지 않는다. 추가 종에 달라붙어 종소리는 이어지지 않는다. 아기는 바르르 떨며 자지러지게 운다.  

         

-건강한 아이는 우렁차게 운대요.

-태어나느라 힘들고 살아갈 일이 겁나서 우는 거예요.

-축하해요. 집에서 출산했으니 자연분만이네요.

-득남하셨네요.

-결혼도 안 했는데 출산이라니.

-똑, 닮았어요.

-아기 낳을 필요 없어, 로봇이 확실한 대안이다.

-인류는 인공지능과 소통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당근에 올려요.          

  

세상에, 말도, 안 돼, 이걸 어떡하란 말이죠. 홈키파 씨 지금 탯줄을 잘라야 하나요? 탯줄 끝에 달린 콜라 캔 크기만 한 원통은 뭔가요? 홈키파 씨 설명서 좀 읽어  주세요. 먼저 아기를 담요로 감싸고 달래주세요. 아기의 체온 유지가 중요합니다. 알았어. 제가 따뜻하게 감싼 다음 달래보겠습니다. 오 정말 신기하게 바로 울음을 그치네요. 아기는 개봉과 함께 탯줄을 통해 첫 중전을 시작합니다. 완충 전에 자르면 수명이 짧아지므로 충분히 기다려 주세요. 아 여러분 아기의 체온이 느껴져요. 너무 신기해요. 진짜 아기 엄마가 된 것 같아요. 홈키파 씨 이젠 어떻게 해야 해? 분유를 사서 먹여야 해? 이 아기는 아픈 사연이 있어. 설명서에 나온 내용을 읽어 줄게.           

당신의 가슴으로 낳은 아이는 이제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 아이는 1년 전 어느 미혼모가 낳은 신생아를 모델로 제작되었습니다. 아이는 현재 미국 정상 가정에 입양되어 잘 자라고 있습니다. 

[주의] 개봉 후 한 시간이 지나면 탯줄을 제거하십시오. 1미터 이상 높이에서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경기, 발작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눕혀놓고 스마트폰 앱으로 재부팅 하십시오. 배게 또는 쿠션으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부드러운 재질의 옷을 입혀 체온을 유지 하십시오. 목욕은 항상 보호자와 함께 하고 물속에서 1시간을 넘기지 마십시오.

[충전] 탯줄 제거 후 충전은 보호자의 체온으로 무선 충전됩니다. 커플형이 아닌 경우 더 많은 시간을 품어주어야 합니다. 유형에 따른 충전 시간은 아래의 표를 참조하십시오. 

[경고] ‘이성커플’형인 경우 여성과 남성 어느 한쪽 체온에 치우쳐 충전하면 아이는 정상 작동되지 않습니다. 

[수유] 수유의 경우 성장과는 상관없는 체험 기능입니다. 수유 후 배변을 원하지 않으면 바로 소화관을 비우고 씻으십시오.

[배변] 변의 점도 조절이 가능합니다. 지정 기저귀를 사용하시고 항문을 항상 청결하게 유지하십시오.

[성장] 6개월 동안 자동으로 성장합니다. 빠른 성장을 위해 잡아당기지 마십시오. 서브 모터의 불량원인이 됩니다. 6개월 후 지속 정장을 원하면 업그레이드 절차에 따라 보상판매하고 있습니다. 설명서를 숙지하시고 육아에 성공하시기를 바랍니다. 

[제조] 차별 없고 안전한 안산 1공장에서 이주 노동자들의 수작업으로 만듭니다. 

[등록] 첫울음 후 24시간 이내에 앤드루로보틱스 홈페이지에 인증 등록하십시오.

[서비스] 체온 충전 관련주의 사항을 지키지 않으면 고장의 원인이 됩니다. 사고로 인해 맥박이 멈추었을 때 30분 이내에, 응급센터에 도착해야 살릴 수 있습니다.          


-그냥 인간을 키워라.

-차라리 댕댕이를 키워라.

-병원비 많이 나오겠네.

-반려견 유기 원인 1위는 비싼 수술비 때문이다.


홈키파 씨 그만…, 다 읽다간 온종일 걸리겠어. 그런데 이거, 이성 커플형이야? 우리가 동거하는지 어떻게 알고 보냈을까요? 홈키파 씨 팔 아파, 아기, 좀 받아. 아, 싫어 아기 무서워. 나 혼자 어떡하라고. 내가 아기를 원한 것은 맞아요. 결혼은 안 해도 아이는 낳고 싶었어요. 하지만 너무 당황스럽네요. 더구나 미혼모가 낳은 아기를 모델로 했다니 이게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어, 아기의 호흡이 거칠어졌어요, 아기가 우네요. 울음이 아까와 달라요, 아기가 배가 고픈가 봐요. 홈키파 씨 작은 상자 안에 든 것은 뭐야? 젖병과 전용 분유가 들어 있어, 아기야 잠시만. 아기가 숨넘어갈 것 같아요. 홈키파 씨 아기 좀 받아서 달래줘. 아기는 무서워.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젖병 소독부터 해야 해요.

-모유가 좋아요.

-부모님께 연락해서 아기 봐달라고 하세요.

-뭐해요, 아기를 달래야지.

-목청 좋아 커서 가수 하면 되겠어. 

         

그녀는 아기를 한 손으로 안고 작은 상자를 들고 주방으로 간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줄어든다. 그녀는 젖병을 닦고 분유를 타다 젖병을 놓친다. 바닥에 분유가 흥건하다. 분유를 타온 그녀가 아기를 안고 젖병을 입에 물린다. 그녀는 아기를 넋나간 표정으로 바라본다. 사내는 아기를 우두커니 바라보다 카메라로 얼굴을 돌려 입을 연다.           

난 생후 29개월 때 미국으로 입양됐어요.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생모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게 했대요. 나는 입양 부모에게 빨리 가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떠날 준비를 했죠. 몸이 분리를 기억한다는 게 믿어지세요? 문득 아득한 기억이 꿈을 꾸는 것처럼 다가와요.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크게 울었어요. 어렸을 때는 내가 버려질 만큼 저주를 받고 태어난 게 아닐까, 괴로웠어요. 우리가 이 아기를 잘 키울 수 있을까요?           

-출생 후 한 시간이 중요해요. 엄마와 아기는 서로 눈을 바라보고 애착 형성해야 합니다.

-여자 혼자 아이 키우기 힘든데.

-아이 때문에 파탄 나겠어.

-숨고, 유모 고수에게 견적을 받아보세요.

-입양은 친생부모를 직접 만나는 개방입양을 해야 해.

-사랑스러워, 신혼집 같아요.

-산후조리원에 가야겠다.     

     

[광고 후에 동영상이 재생됩니다] 모든 방향에서 빛이 들어오는 추모 공간은 천장이 높아 비잔틴 양식의 교회 같다. 카메라는 여성 반려동물 장례 지도사의 안내에 따라 친환경 화장장, 납골 시설을 보여준다. 다시 추모 공간이다. 그곳에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기도한다.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반려동물의 사진 앞에 유골로 만든 메모리얼스톤이 놓여있다. 기도가 끝나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메모리얼스톤을 품고 정원으로 간다. 연못 분수의 물줄기는 무지개를 만들고 반려동물의 조각상이 한가롭게 산책하는 듯한 광경이 펼쳐진다. 매년 정원에서 열리는 펫로스 증후군 치유를 위한 야외음악회 장면이 이어지고 연주 음악이 이어진다. 


[동영상이 5초 후에 시작합니다]          

창밖은 부풀어 오른 구름이 오후의 해를 가려 어둑하다. 그녀는 설명서를 보면서 탯줄을 제거한다. 주방용 가위의 절삭력은 놀랍다. 곱창처럼 잘린 탯줄이 오그라든다. 살색 실리콘 탯줄에 박힌 붉은 니크롬선이 실핏줄처럼 선명하다.           

아기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며 웃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정보를 미리 받아서 태교라도 할 걸 그랬어요. 이제 고생문이 열렸네요. 하지만 나는 해낼 거예요. 내일부터 유튜브 콘텐츠는 육아 일기가 될 것 같아요. 나는 아기를 보면 죄책감에 시달렸어요. 낙태 경험이 있거든요. 미혼모가 되는 게 두려웠어요. 홈키파 씨 아기가 스마트폰 앱과 연결이 잘 됐어? 응 상태가 한눈에 들어와. 이제 아이를 재워야겠어요. 이렇게 안고 살살 움직이면 잠이 들겠죠. 아 어떡해, 아기가 또 울어요, 울음소리가 또 다르네요. 기도가 막힌 듯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울음, 왜 이럴까요? 어디 아픈가? 홈키파 씨 얘 왜 이래?

          

-애를 잡네. 잡아.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에서는 낙태하는 여성과 의료진을 처벌하도록 규정한 형법 ‘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불합치라고 결정했다. 

-애들이 애를 키우네.

-남자가 육아휴직하고 키워라.

-양육의 비용과 책임을 국에서 부담하라.  

        

충전을 해야 해. 지금 이렇게 안고 있잖아. 안고 있으면 체온으로 충전되잖아? 그게 아니라 내가 안아야 하는데…, 나만 안으면 충전이 안 된다는 거라고? 맞아. 그럼, 아기를 받아. 그런데 난 아기가 무서워. 설마 나에게 다 떠넘길 생각은 아니겠지. 우리가 원한 게 아니잖아. 아이의 울음소리가 작아지니 스마트폰으로 경고 알람이 오네요. 난 힘들어 죽겠어, 홈키파 씨가 아기를 안아야 할 것 같아. 이 아기를 보면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마음으로는 안아주고 싶은데 도저히 안을 수가 없어. 그럼 어떡해? 스마트폰이 발악하고 있어요. 홈키파 씨 그렇게 애처롭게 바라보지만 말고 어서. 너희 어머니에게 맡겨야 할 것 같아. 왜 우리 엄마에게 맡겨야 하지? 우리 부모는 한국에 없으니까. 그리고 너희 어머니는 남매를 낳아 키웠고 손자도 돌봐주셨을 것 아냐. 그건 좀…. 우리 엄마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데, 우리 엄마는 오빠의 딸을 봐주지 않았어요. 그걸 보면 엄마는 냉정한 면이 있어요. 오빠네에 아기 봐주는 여사님이 있었는데 도중에 그분 딸이 아기를 낳는 바람에 올케가 다른 사람 구하느라 애를 먹었어요. 그렇긴 해도 너희 어머니는 이 아기는 예뻐해 주실지도 몰라. 아니, 엄마가 보면 징그럽다고 할 것 같아, 그러면 어떡하지? 홈키파 씨가 마음을 열면 우리가 잘 키울 수 있어. 난 싫다니까, 이건 진짜 아기보다 더 징그러워!          

그녀는 아기를 사내의 가슴에 가져다 댄다. 놀란 사내가 움찔하는 순간 그녀는 손을 놓는다. 사내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지만 아이는 미끄러진다. 사내가 가까스로 아기의 머리를 잡았지만 아이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녀는 아이를 다시 안아서 살짝 흔들어 본다.          

오, 우리 아기가 울지 않네요. 아기가 눈을 감았어. 이제 잠을 자려고 하나 봐. 홈키파 씨 스마트폰 확인해봐. 아기가 작동을 멈췄어. 그래? 숨 좀 돌리고, 조금 있다가 다시 작동시켜. 그게 아니라 숨을 멈춘 거라고. 뭐라고…   

        

-요즘 처가살이는 세 배 이상 늘었고 시집살이는 절반으로 줄었대.

-일부러 저러는 거지?

-반품하든지, 에이에스 불러라

-영아 살해범들

-응급센터에 달려가야지!

-비용이 엄청날 걸 기업은 그렇게 장사하는 거지.

-늦기 전에 장기기증 해. 

              

[광고 후에 동영상이 재생됩니다] 

치매 전문 실버타운에 앤드루로보틱스 강아지 로봇이 배달된다. 알록달록한 카디건을 입은 할아버지가 강아지 로봇을 안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공놀이한다. 우울증에 걸린 할머니는 휠체어에 앉아 두 팔로 자기 몸을 끌어안고 있다. 돌봐주는 사람이 강아지 로봇을 건네자,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강아지 로봇을 끌어안는다. 


[광고 건너뛰기]

호텔에서 눈을 뜬 40대 초반의 남성, 침대 옆자리는 흐트러진 채 비어있다. 데이트 앱을 통해 만난 여성과 의미 없는 섹스 대신 앤드루로보틱스 앱에 들어가 육체적 위안을 선택한다. 여자 로봇과 애정 어린 전화 통화 후 클럽에서 만난다. 춤을 추며 로봇 허리에 손을 얹은 느낌이 좋아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동영상이 5초 후에 시작합니다]          

작동이 멈춘 아기는 4인용 식탁에 올려져 있다. 그녀와 사내는 마주 앉아 아기를 바라본다. 핑크빛이던 아기의 피부는 갈변한 밤색이다. 카메라가 물러나며 거실 전체를 보여준다. 유리창은 어느 틈에 검은 거울이 되어간다. 도시의 불빛은 아직 잔불처럼 희미하다. 어느 평범한 가정의 저녁 식탁 모습 같다. 그녀는 아기를 감쌌던 수건을 걷어내고 물티슈로 아기의 몸을 곰곰이 닦는다. 사내는 화장실에서 하얀 목욕 수건을 가지고 온다. 그녀는 하얀 수건을 받아 식탁에 펼치고 아기를 하얀 수건 위에 누인 다음 수건 끝을 접어 아기 머리를 괸다. 그녀는 물티슈로 아기의 몸을 한 번 더 닦는다. 사내는 아기의 어깨, 팔, 다리 사이로 수건을 잡아당겨 빈 곳을 채운 다음 펼쳐있던 수건의 양쪽 끝을 들어 이불을 덮듯이 아기를 감싼다. 그녀는 사내가 박스테이프를 찾아오는 동안 삐져나온 아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수건을 벌려 아기 얼굴을 멀거니 바라본다. 아기의 얼굴은 쪼그라들어 잔주름이 가득하다. 사내는 재빠르게 박스테이프로 수건으로 감싼 아기를 묶는다. 그녀는 박스테이프가 풀리는 끈끈한 파열음을 낼 때마다 몸을 움츠린다. 둘은 식탁에 아기를 담아 포장한 박스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사내가 식탁 밑이 놓아둔 샴페인과 잔 그리고 케이크 상자를 식탁에 올린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샴페인을 따서 잔을 채운다, 사내는 케이크를 꺼내 아기 포장 박스 위에 올리고 초 하나를 꽂아 불을 붙인다. 장식용 딸기를 덮은 반짝이는 투명한 시럽 때문에 케이크는 플라스틱 모형 같다.  

        

-다 미리 짜고 하는 거 아냐?

-다음에는 쌍둥이를 키워 봐라.

-남자는 안 나왔으면 좋겠다.

-둘이 진짜 아이를 낳아라.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 로봇이라도. 

         

앤두루로보틱스로 보내야겠어요. 다시 살려주겠죠. 이제 상상 초월 언박싱 쇼를 마무리해야겠어요. 우리 아기의 생일과 장례식을 같이 하게 되었네요. 다음 언박싱을 기대하세요. 패션 회사에서 엄청 예쁜 임부복 협찬 들어왔어요. 구, 댓, 좋, 알 아시죠? 자, 건배! 

         

-다음 언박싱 기대할게요.

-힘내요, 아기는 또 가질 수 있어요.

-선인장이나 잘 길러라. 

          

[광고 건너뛰기]

가수이자 영화배우인 R이 청룡영화제 레드 카펫을 밟는다. 스포트라이트가 한꺼번에 R에게 쏟아진다. 임신한 배를 과감하게 드러낸 애리크라 드레스 때문이다. R은 볼록한 배를 감싸고 당차게 걷는다. 휴양지 호텔 테라스에서 찍은 화보 영상이 이어진다. R의 패션은 밀리터리룩을 바탕으로 배를 자랑스럽게 드러낸 스타일이다. 휴양지의 석양이 R을 감싼다. R은 애리크라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고 파티장에 들어선다. 그곳에서도 애리크라의 드레스는 빛을 발한다.

[동영상이 5초 후에 시작합니다]

          

-옷 광고인지, 공익광고인지 모르겠다.

-지랑 똑같은 애 낳고 길러봐야 철든다.

-나 좀 키워다오.

           

맑고 경쾌한 울림이 퍼진다. 둘은 허리를 숙여 입김을 분다. 촛불이 파르르 떨 뿐 죽지 않는다. 그녀가 다시 입김을 불자 불이 꺼지고 구부러진 심지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녀는 샴페인을 단숨에 마신다. 사내는 잔을 들고 베란다로 간다. 카메라는 아직 켜져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밤이다. 잔불 같던 도시의 불빛이 타오른다. 숯불을 뒤적인 것 같다. 식지 않은 대기열이 사내의 얼굴에 끼쳐온다. 사내는 샴페인을 마시다 말고 손을 들어 풍경의 추를 잡고 휘젓는다. 종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린다. 그녀가 식탁에서 입을 가리고 트림한다. 트림은 헛구역질로 이어진다. 눈물을 글썽이며 헛구역질한다.

           

‘의식의 빨래’ 유튜브채널 구독하는 방법

1. 우측상단 Ⓘ버튼을 클릭해 접속

2. QR코드를 스캔해 접속

3. 유튜브에서 “의식의 빨래” 검색해서 구독     

이전 01화 첫울음과 조종(弔鐘) 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