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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지혜 Aug 25. 2023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는
달콤한 거짓말

(13). B급 영화를 찍다.

    R을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그냥 집에 있긴 심심하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긴 더 싫은 그런 날이었다. 공부도 손에 안 집히겠다. K는 주변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러다가 친구 F로부터 같이 영화나 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예술 영화인데 영화전공 학생이라 표 값도 반값으로 볼 수 있다고. 번뜩 좋은 기회다 싶어서 그 길로 극장에 갔다. 하지만 영화는 생각보다 시시했고, 그냥 집에 가기도 뭐해서 둘은 템스 강변의 한 펍에서 피시 앤 칩스를 먹었다. F는 맥주도 한 병 마셨다. 이제 그만 집에 갈까 했더니 F가 K를 잡았다.        

         

           “친구 불러서 술 한잔할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친구?”          


        친구라는 말에 갑자기 관심이 갔다. F와는 술 한 잔도 같이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친구라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런던 중심가인 토튼햄코트로드에 도착하자 F의 친구가 나와 있었다. R이었다. K는 R을 보자마자 잔뜩 실망해서 집에 가고 싶었다. 애꿎은 F에게 눈빛으로 왜 이런 애를 불렀냐고 말했지만 F는 모르쇠였다. 도드라진 사각턱은 유난히 각져보였고, 얼굴에 난 여드름은 왠지 외로워 보였다. 단 하나 외모와 달리 너무 멋진 그의 목소리는 K에게 “조금만 있다 가자”라는 집에 안 가도 될 동기부여를 가져다줬다. 그렇게 셋은 한인식당에 가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약한 K는 홀짝홀짝 조금씩 술을 마시는데 F와 R은 술이 물인가 싶을 정도로 열심히도 마셨다. K는 혼자만 너무 안 마시는 게 미안해서 소주를 석 잔 연거푸 마셨고, 술이 조금씩 올라왔다. 그런데 갑자기 F가 벌떡 일어났다.   

       

        “난 안 되겠어. 취해서 가야겠다. 너희들끼리 마셔라.”  

        

      F가 엉뚱한 건 알고 있었지만 술에 취했다고 먼저 자리를 떠나다니. 왜 저러나 싶은데 순간 K는 머리가 멍해지면서 세상이 뭔가 한층 들떠 보였다.     


           “세상이 왜 이렇게 아름답지.”

            “취했나 보네요."                    

            “아니요 전혀 안 취했어요.”           

    

     그 말을 끝으로 K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런던 시내를 R과 걷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R이 K에게 기습 키스를 했다.               


        “왜 허락도 없이 키스를 해요?”

        “아까 먼저 키스했거든요.”   

                

        K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괜히 소주를 석 잔 마신 게 화근이었어.' 술을 많이 마신 걸 후회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못생긴 네모난 얼굴의 R의 모습은 누구보다 멋진 남자로 변해있었고, R의 목소리가 자꾸자꾸 듣고만 싶었다. R의 키스가 나쁘지 않았다. 은근슬쩍 술에 아직 취한 척하면서 K는 R에게 또 키스를 했다. 술은 올라서 주변 모습들이 아련하니 아름답지, 지금 이 상황이 싫지 않았다.  

             

           “취했으니까 집까지 같이 가요. 위험해서 안 돼.”               


        R은 K의 집까지 같이 걸어갔다. 집 앞에 오자마자 R은 K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내일 전화할 거니까 꼭 받아요. 알았죠?”              

 

        사실 K는 이미 술이 깬 상태였다. 하지만 부끄러워서 일부러 취한 척하면서 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전화가 왔다.               


            “괜찮으면 우리 만나요.”      

    

    K는 R에게 잘 보이려고 예쁜 원피스를 입고 나갔다.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난.”  

             

    R은 K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담. 네가 너무 못생겨서 집에 가려고 했는데.”

           “못 생겼다니. 이렇게 잘생긴 미남자한테.”         

      

        R의 너스레에 K는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R은 K 마음 안에 들어왔다. R은 영화연출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이자 감독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나 사람들, 그리고 K의 모습까지 손가락으로 카메라처럼 앵글을 만들어서 보는 습관이 있었다.               


           “넌 이 네모난 카메라 속에서 가장 완벽한 그림이 되는 나의 이데아야.”    

           

 극작을 전공했던 K는 R과 함께 영국 록 그룹 음악들을 들으면서 밤새 같이 글도 쓰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함께 봤다. 그와 함께 있으면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들도 다 멋있어지고 특별해졌다.               

         

          “너랑 있으면 모든 게 특별해져.”     


K가 말했다.               

         

             “난 너랑 있으면 자꾸만 마음이 안정되고 평온해져. 그게 문제야."

            “그게 왜 문젠 대”

           “난 항상 불안하고 힘들어야 하거든. 근데 그 불안을 네가 자꾸 깨버려. 너한테 정착하고 싶어져.”

           “정착하는 게 뭔데.”

           “결혼이지 뭐.”

           “까짓 거 하면 되지.”

           “난 멋진 영화를 한 편 찍을 거야. 누가 봐도 야 끝내준다 이런 소리가 나올만한.”

           “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려면 난 계속 불안해야만 한단 거야. 요 꼬맹이 아가씨~”     

     

     K는 R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R은 남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세상을 갖고 있는 남자였다. K는 자신도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R에 비하면 자신이 만든 세계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R은 영화를 찍는 사람이지만 영화 속 주인공 같기도 했다. 어떤 때는 너무 깊은 자신만의 감정에 빠져서 말을 건네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감정의 깊이를 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면 안 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중 일이 터지고 말았다. 늘 불안하고 힘들어야 한다고 했던 R이 잠적해 버린 거다. 분명 어제까지 만나서 웃으면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는데, 하루아침에 연락이 끊겼다. 전화를 해도 안 받거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불안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혹시 아파서 쓰러져 있는 건 아닐까.”               


    K는 R에게 음성 메시지도 남기고 전화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R에게 전화가 왔다.          


           “만나자.”               


대뜸 만나자는 얘기만 하는 R. 그는 K집 앞으로 찾아왔다.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

           “뭐?! 네가 연락 안 해놓고 친구라니”

           “영화 촬영하고 있었어.”

           “미리 말했더라면 내가 그랬겠어?”  

             

 억울했지만 R의 말에 그러기 싫다는 말은 자존심이 상해서 차마 할 수 없었다.          


           “김승옥 책 좀 빌려줄 수 있어?”

           “끝내자면서 책은 왜 빌려달라 해. 싫어.”

           “끝이 아니라 친구로 지내자는 거잖아.”               


     K는 경기에서 진 사람처럼 분하고 억울했다. “책 따위는 빌려주지 않겠어. 그러자 R은 뒤돌아서 손을 한번 흔들더니 사라졌다. 그렇게 R과의 인연은 끝이 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 넓은 런던에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R과 K는 자꾸만 마주쳤다. 커피를 마시러 커피숍에 들어가서도 R을 만났고,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가서도 R과 마주쳤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뭔가 기분이 묘해서 돌아보면 R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왜 자꾸 내 주변에 있는 거야. 보기 싫어.”         

           “그러게. 우리가 인연이긴 한가 봐. 자꾸 마주치게.”

           “다 끝난 사이잖아. 놀리지 마.”

           “끝난 게 아니라 친구였지. 친구는 늘 열려있는 관계잖아.”

           “그래 너나 실컷 열든가 말든가 해.”

          

     K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얼마간은 R을 만나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왜 만나지 않지?” 너무 자주 만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너무 만나 지지 않아서 이상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몇 달이 지났을까. K는 더 이상 R을 떠올리며 마음 아프지 않았다. 가끔 R이 그리울 때도 있었지만 그에 대한 그리움보다 원망이 컸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다 도서관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서너 명 모여 있었다. 누구지? 하고 보는데 F와 R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R은 많이 취해 보였다.

               

           “모르는 척하고 지나갈 거야".


      K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앞을 지나는데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지 마!”     


 R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자, R은 뛰어와서 K를 꼭 안았다.

          

        “내가 잘못했어. 다 잘못했다고. 그러니까 가지 마.”          


 F와 다른 친구들은 “우~~”하면서 박수를 쳤다. 그날 둘은 집에서 밤새 사랑을 나눴다. R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정적이었고 그 모습에 놀랐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살 냄새를 맡으면서 잠이 들었다.    

       

        “난 네 냄새가 좋아.”

        “네 냄새는 더 좋은데.”

        “우리 꼭 두더지 같다.”               


 한번 헤어지고 다시 만난 K와 R은 마치 오늘이 마지막 만남인 것처럼, 뜨거웠고, 간절했다.    

      

        “만약에 또 날 떠나면?”

        “만약이란 말은 없어. 난 너 안 떠나.”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네가 날 떠날 수도 있지.”

        “누가 먼저 떠나든 그땐 그냥 뒤돌아서 가자. 서로 힘들지 않게. 빨리 떠나자. 한번 돌아서면 절대 다신 아는 척도 하지 말자.”              

 

     그때 K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R과의 만남은 다시 끝날 거란 걸. R은 그럴 리 없다면서 웃었다. K는 웃을 수 없었다. 몇 달이 지났을까. K가 덤덤한 표정으로 R을 찾아왔다.                 

      

     “우리 술 마실까?”          

 

    술도 잘 못하는 K가 술얘기를 하자 R은 이상했다. K에게 술을 한잔 따라주고 R이 술을 따라 한잔 마시려는데          


        “나 임신했어.”              

 

K가 길게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R은 마시려던 술잔을 잠시 쥐고 있다가 금세 다시 마셨다.          


        “좋은 거잖아. 왜 심각해.”

        “우리가 지금 뭘 할 수 있는데.”

        “뭘 하긴. 아기를 위해 뭔가 하면 되지.”

        “넌 영화감독 지망생, 난 작가 지망생이야. 우리가 무슨…”

        “왜 그런 핑계를 대. 임신한 게 싫으면 싫다고 해.”

        “그래 싫어.”

        “결혼하면 되잖아. 왜 싫은데.”

        “지금 너랑? 지금의 너랑 나랑?"      

         

K는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술을 마시려고 잔을 만졌다가 내려놨다.     

          

           “안 되겠어 난. 지금 그렇게 할 수 없어.”               


    K는 일어나서 가방을 들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문밖으로 나갔다. R은 일어서서 한참 서 있다가 다시 앉아 술을 따라 마셨다.               


            “뒤돌아서 가는 거야. 상대방이 힘들지 않게.”             

  

     K가 한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R은 K에게 여러 번 전화했지만 K는 받지 않았다. 얼마 후 K는 F로부터 R의 편지를 전해 받았다.      

         

           “정말 그렇게 돌아서서 가버리는구나. 나에게도 기회를 줄 수 있지 않겠니?”

           “이게 끝이라면, 네가 원하는 거라면 알았어. 통장으로 돈 부쳐 놨어. 수술비로 써. 하지만 난 이게 끝이 아니길 바란다.”          


     K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친구들은 왜 R과 결혼하지 않냐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불안정한 사람과 불안정한 사람이 만나면 평화는 찾아오지 않아.”               


          그 후 R은 K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얼마 후 K는 임신 중절 수술을 했다. 혼자였다. 누군가를 부를 자신도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앓아누웠는지 모른다.          


        “다시는 우연이라도 만나지 않기를.”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그 말 뒤에 나온 이야기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그저 가슴속에서만 뱉어야 했다.               

       “만일 우연이라도 만난다면 나를 꼭 안아줘.”    

           

    찬란한 태양처럼 시작된 사랑. 빛나는 모든 것이 너와 나의 이야기였다. 고요했던 하늘이 붉게 물들면 매일 매일이 새로워지는 시간들.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태양이 빛나면 우리의 이야기도 함께 빛났다. 하지만 약속했던 것처럼 빛은 서서히 어둠을 몰고 왔다. 이별은 달이 뜨지 않은 밤하늘처럼 캄캄하다. 입술을 깨물고 참아봤지만 끝내 울고 말았다. 오지 않는 달을 밤새 기다리듯이,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이별했다. 밝음과 어둠을 가르며 우리의 이별은 시작되지 않은 만남처럼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너와 이별했지만 이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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