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너와 나의 마지막 이별이야기
K가 영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나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은 한인회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을 찾는 일이었다. 각 학교의 한인회와 유학생모임 등을 찾으면서 그녀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영국 연락망을 만들었다. 이러던 중, 이메일이 한통 왔다. 한국말과 영어가 뒤섞인 내용이었고 보낸 이는 D였다.
“안녕하세요. 유학생 모임에 올린 글 봤어요. 도움을 주고 싶은데 연락해도 되나요. 내 메신저 아이디는 000에요”
먼저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니 그저 반갑고 고마울 수밖에. 메신저로 연락을 하게 됐다.
"D라고 해요. 00 학교에 다니고 있고 게시판에서 글 봤어요. 미니홈피 들어가서 사진도 봤어요.”
“도움을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뭐든 도와줄게요.”
그렇게 몇 시간을 얘기했을까, K는 D가 태어나자마자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에 온 재영 한국인이고, K가 들어가려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중요한 건 K보다 다섯 살이나 연하라는 것. 도움을 주고받는데 나이가 뭐가 중요한가 싶어서 K는 당장 필요한 것들부터 하나씩 D에게 얘기했다. 학교에 써내야 할 이메일도 많이 있고, 서류상으로 채워 넣어야 할 것들, 머물 숙소와 은행계좌 개설, 핸드폰 개통, 등등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D는 “that’s ok” 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몇 달간의 유학 준비과정을 D를 통해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드디어 유학을 떠나던 날. D는 공항에서 K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 살 연하라는 말을 실감이라도 하듯 앳된 얼굴에 수줍게 아이처럼 웃는 D를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했다. K를 위해 차까지 갖고 와서 숙소로 데려다주고 짐을 날라주면서도 D는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맛있는 거 꼭 사줄게 알았지?”
“오케이 누나. 근데 괜찮아요. 좋아서 한 거 에요.”
어느 정도 영국에서의 생활이 적응이 될 때쯤 D는 K를 시내로 불러냈다. 어느 작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데 갑자기 D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누나 이거…”
“이게 뭔데.”
“오늘 밸런타인데이잖아요.”
“어 그래 고마워.”
K는 아무렇지도 않게 초콜릿을 받았다. 그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생각조차 안 하고. 그날 저녁 D로부터 전화가 왔다. D는 몹시 흥분해 있었고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했다.
“누나 왜 내 마음 몰라요.”
“무슨 마음?”
“초콜릿 줬잖아요.”
“초콜릿? 아까 고맙다고 했잖아.”
“노노 그것 말고. 누나는 나 사랑해요?”
“왜 그래. 너랑 나랑 몇 살 차이 나는 줄 알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요. 한국말엔 그거 없어요? 누나 좋아해요.”
“나도 너 좋아.”
“아니 그거 말고,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K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날 사랑한다고? 네가?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다음 날, D는 K의 기숙사로 찾아왔다. 기숙사 방에 들어온 D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더니 얘기를 시작했다.
“누나 사진도 보고 얘기도 하고. 그때부터 사랑했어요."
“그걸 왜 갑자기 얘기하는 건데.”
“언제 얘기할지 고민했어요. 언제가 맞는 타이밍인지.”
“난 준비가 안 됐는데. 네가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돼.”
“내가 왜 누나 일을 앞장서서 했겠어요. 친절을 베풀기 위해?”
“나한테도 시간을 줘.”
D를 보내고 나서 K는 생각에 잠겼다. D를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귀엽고 착한 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떤 선택이 옳은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D가 자신 곁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그것 또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네 말대로 할게”
K와 D는 그렇게 누나와 동생 사이에서 연인이 됐다. D는 K를 공주님 모시듯이 대했다. 어딜 가든 차를 가져와서 편하게 움직이게 했고. 아직 영어가 서툰 그녀의 과제도 도와주고 영어도 가르쳐줬다. K는 동생으로만 편하게 생각했던 D가 동생이 아닌 든든한 오빠로 보였다. 자세히 보니까 키는 작지만 이목구비가 선이 굵고 이국적이라 미남이었다. 그의 큰 손은 또 어떠한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얼굴을 만져줄 땐 북극 얼음까지도 녹여줄 것만 같았다.
“너는 내 애기야. 귀여운 애기.”
D는 K를 '애기'라고 불렀다. 그 말이 싫진 않았다. “no”라고 하고 교제를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자신의 선택이 참 잘한 일이다 싶었다. 하지만 K를 당황하게 만드는 일은 벌어지기 시작했다. D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아버지도 선교사인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의 종교적 믿음과 거기에 쏟는 에너지는 대단했다. D의 가족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족 예배를 드린다. 예배 후에는 가족들이 집안에 있는 음악실에서 찬양을 연주하고 부른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가족 예배를 또 드린다. 수요일엔 수요예배에 참석하고 토요일엔 토요 예배에 참석하고 일요일엔 예배와 그룹 소모임 등을 갖는다. 어릴 때 교회에 다닌 적은 있지만 크리스천이 아닌 K로서는 D와 그의 가족의 신실한 믿음은 부담스러웠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얘기로만 “같이 교회 가자”, “같이 가족 예배드리자”라고 얘기했던 D는 이제는 노골적으로 K가 교회활동과 심지어 봉사활동까지 함께 하길 바랐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D는 실망한 듯 한 표정이 역력했다. 결국 더는 피할 수 없어서 K는 D의 제안대로 가족 예배와 교회에서 하는 수요예배를 함께 갔다. 좋은 의도로 하는 건 알겠지만 그 자리가 힘들었다. 이것을 진지하게 참여하고 있는 D가 힘들었다. 모든 것이 힘들었다.
“너무 힘들어.”
“애기야 왜 그래. 뭐가 힘들어?"
“너한테는 자연스럽겠지. 그렇지만 난 아니야. 불편하고 부담스러워.”
“진심이야?”
“그래.”
“누나가 그러면 우린 안 돼."
“나 좀 그냥 내버려 둬. 자신 없어.”
K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D가 좋지만 그의 신앙생활을 함께 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D가 전화를 했다. 할 말이 있다면서 나오라고.
"예배드리고 교회 가잔 말이면 그만했으면 좋겠어.”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면 안 될까. 누나는 하나님을 오해하는 거야. 설명해 줄게. 내 얘기 듣고 나면 이해하게 될 거야.”
D는 열심히 하나님에 대해 열심히 얘길 했다. 하지만 D의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넌 나하고 섹스도 안 하잖아.”
“그… 그건.”
“왜? 그것도 성경에 나오니?”
“난 누나를 아끼는 거야. 결혼할 거잖아. 우리. 그다음에 하면 되잖아.”
“난 너와 결혼하지 않아.”
“뭐가 문제야. 왜 그래.”
“문제는 없어. 너와 내가 다를 뿐이야. 우리 그만 헤어지자.”
“뭐라고?”
“헤어지자고, 힘들어.”
K는 꽉 깨문 입술 사이로 떨어지는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그만하자 우리. 넌 네 삶의 방식대로 난 나대로 그렇게 사는 거야. 맞고 틀리고는 없어.”
D는 가만히 K의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알았어. 누나가 힘든 거 싫어. 아픈 거 싫어. 보내줄게.”
먼저 커피숍에서 나간 것은 D였다. D의 뒷모습을 보고 K는 한참 말없이 울었다. “이게 끝이구나. 결국 끝이구나.” 얼룩진 화장을 휴지로 닦아 내리고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갔는데 커피숍 앞에 D가 서있었다. 울고 있었다. 둘은 눈이 마주쳤다.
“이 바보.”
“나 바보 아니야.”
D는 K를 끌어안았다.
“교회 가라고 안 할게. 그러니까 가지 마 제발.”
“바보. 넌 바보야.”
그날 D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K의 기숙사방에서 밤새 함께였다. 그리고 누나를 더 이상 아끼지 않을 거라는 농담까지 하면서 K와 밤새 사랑을 나눴다. D는 이렇게 다시 시작된 사랑을 꿈꿨지만 K의 생각은 달랐다. 곤히 잠든 D를 보고 조용히 일어나서 연어스테이크 밥상을 차려서 책상 위에 두고 메모를 남겼다.
“잘 잤니? 네가 좋아하는 연어스테이크야. 이거 먹고 집에 가.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너에게 돌아갈 수 없단다. 이해해 주렴”.
K는 전화기를 끈 채 기숙사방을 나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D로부터는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반년이 흘렀을까? 주변 친구들로부터 D가 좋은 직장에 취업을 했단 소식을 들었다. 또 어떤 친구는 D가 여전히 K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했다. K의 마음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돌아갈 순 없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의 감정만으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얼마 후 낯선 번호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다. D였다.
“누나!”
“……”
“전화 끊지 말고 제발 들어줘”.
“말해”.
“나 다음 주에 미국 가. 직장 구했어.”
“잘됐네 축하해."
“한 번만 만날 수 없어? 남자로서 아니라도 좋아. 동생으로서라도.”
마지막인데 못 만날 것도 없지 않은가. D는 언제나처럼 K의 기숙사 앞으로 차를 몰고 왔다.
“미국 가면 가족들이랑도 떨어져 살아. 5년 계약이야.”
“잘됐네.”
“매일 예배드리고 그런 거 안 해도 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우리 같이 가자. 학교도 미국으로 옮기면 되잖아. 내가 다 알아서 해 줄게.”
순간 K는 멈칫했다. '정말 같이 떠날까 그럴까. D만 있으면 다 되잖아. 못할 거 없잖아.'
머릿속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K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우리 이미 끝났잖아.”
K의 거짓말에 D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고개를 떨구며 한참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넌 너처럼 신실한 사람을 만나야 돼. 교회도 먼저 열심히 다니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
“그런 얘기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D는 K를 내려주고 떠났다. K는 자신이 왜 그때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하고 떠나보냈지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머리 위로 보이는 파란 하늘도 땅 밑까지 내려와 울고 있고, 지붕 위에 올라간 구름들이 견디지 못하고 땅으로 쏟아져 버렸다. 모든 것이 밑으로 밑으로만 내려간다. K의 마음도 밑으로만 내려가 눈물도 모자라 주책없게 어깨가 외롭게 흔들렸다. D를 보내고 나서 마음을 추스르려 했다. 그러나 잘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를 잊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가 그리웠다. 어떤 날은 밤새 꿈에 나타나 D가 K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무슨 얘길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다.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널 데려다주고 나서 교통사고가 났대. 음주 운전한 차량이 와서 받았다나 봐."
"D가 죽었다고? 말도 안 된다. 이건 거짓말이다."
도저히 D의 죽음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내가 만약 그때 D를 그렇게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가 하자는 대로 미국에 가겠다고 했더라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텐데.”
D를 잃은 상실감보다 그가 죽게 된 이유가 다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몹시 힘들었다. 꿈에서 그녀에게 하려던 말이 이런 거였을까. K는 그 후로 오랫동안 방황하고 아팠다. 어디선가 “누나”하고 D가 달려와서 그녀를 꽉 안아줄 것만 같은 착각에 힘들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K는 교회 앞에만 가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어느 날, 교회에 들어가 봤다. 예배는 없었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개방되어 있던 교회. 뒷자리 모퉁이 쪽에 조용히 앉아봤다. 정면에 보이는 십자가와 은은히 들리는 풍금소리. K는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D를 보살펴주세요. 착한 D가 그곳에서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웃는 일만 있게 도와주세요. D의 밝음과 어둠과 행복과 불행과 기쁨과 슬픔. 이 모든 것을 함께 해주세요. 아멘.”
만약에 다시 한 번 K에게 D가 같이 떠나자고 물었다면 K는 다른 대답을 했을까? K는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가 가만히 미소 지으며 눈을 떴다.
“달라질 순 없었을 거예요. 그게 나와 D가 가야 할 다른 길, 다른 운명이니까요.”
이별은 새벽 6시 나무 아래 홀로 서있는 것이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둑어둑한 길목에 서있는 나무. 함께였을 때 빛나던 나무는 이제 어둠에 잠겨 있다. 혼자 남겨질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차갑게 식어버린 나무를 어루만지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시간은 흘러갔지만 나무는 아직 그대로다. 너는 떠났고, 허리춤까지 차버린 슬픔을 보낼 수 없었다. 또 하루가 가고 다시 하루가 간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 자신도 없이 가만히 서있다. 그러다 네가 생각날 때마다 나지막이 부르면 어느새 처음 만났던 그 자리에 와있다. 이별도 사랑일 수 있다면 웃으며 너를 보낼 수 있겠지. 하지만 너는 내 곁에 없다. 멈춰서 바라보던 너를 안고 이별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