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깊이에 관하여

악플을 대하는 자세

by 일상라빛


삶과 작가의 깊이


각각의 소설을 쓸 때마다 소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 삶을 살다 나왔다. -연년세세 황정은


삶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은 깊이 있는 작품을 다룬다는 것 과도 같다. 서평만큼이나 어려운 작업은 없다. 중고등학교 때나 했던 단순한 줄거리 요약이 아니었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세세히 비누칠을 하고 물로 씻고 탈탈 털어서 새 옷이 되기 위한 빨래를 하는 것과 같다. 그만큼 작가의 시선과 깊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일이기에 웬만한 내공과, 삶의 농도와, 글의 깊이가 진하지 않으면 섣불리 도전하기 어려운 일이다.


'써보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일단 적어봅니다. 그리고 생각하죠. 내가 지금 다룰 수 있는지 없는지. 몇 년 후 다시 들춰봤을 때 '어? 이제는 좀 쓸 수 있겠는데?'의 순간이 온다고. 그럴 때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탄생합니다.' _소설가 이영하


이영하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작가도 써보고 싶다고 모든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간접체험, 전문가 인터뷰, 공부를 해서라도 내 것으로 체득이 되어야만 내 글밥이 된다. 어설프게 글쓰기를 시도했다간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대략 난감한 대상의 폐기처분 신세가 돼버리고 만다. 그러나 휴지통이 아닌 작가의 서랍에 잠시 머물게 한 다음 다시 꺼내 본 미완성의 글은 서랍에 있던 그 시간만큼이나 작가의 성장 깊이가 더해져 비로소 완성이 될 수 있다.


지나 보면 알게 되고 살다 보니 의미가 되는 '삶'처럼 그땐 미처 몰랐던 작품의 의미, 작가의 의도를 알게 되는 시점이 있다. 그럴 때 작품 해석이란 것이 탄생하게 된다. 단순히 멋져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겉핥기 댓글을 넘어 무엇이 멋지고, 어느 대목이 왜 좋은지를 자세히 파헤쳐야만 한다. 한두 번 읽어서는 안 된다. 여러 번 탐닉하고 읽고 또 읽으며 작가만큼이나 작품의 주인공의 삶을 살다 나와야 한다. 그만큼 애정과 관심을 들여야만 의미 있는 한 줄 서평이 나오는 것이다. 비평도 마찬가지다. 애정이 없다면 말을 걸지도 않는다. 그러니 악플을 ‘악심(惡心)’으로 대하기보다 ‘관조(觀照)’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악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대부분 작가의 잘못 보다는 잘못을 지적하는 척하며 왜곡된 타자의 시선, 뒤틀린 마음이 문제인 타인의 잘못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거기엔 시기, 질투, 비교, 전이, 분노의 복잡다단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단지 어떤 식으로든 누구에게든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고 안타깝지만 내 글의 어느 포인트가 타자의 마음에 침식작용을 하여 와르르 무너져 내렸을 수는 있다. 이 또한 달리 해석하면 투영의 결과물이다. 다만, 표현의 방식이 심히 악의적이라는 것이 가슴이 아픈 것은 사실이다. 마음이 병든 사람에겐 치유가 필요하 듯 스스로 다스릴 여유와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다. 어설픈 위로와 공감은 더 화가 된다. 묵묵히 악플을 견디는 것도 작가가 감당해야 할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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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브런치의 인기글 TOP2 '39살 경단녀입니다'는 기록적인 조회수를 돌파하고 있었다. 공감 댓글 중 딱 한 개의 악플이 달렸다. 그 댓글을 두고 독자들끼리 '썰전'을 펼치고 있었다. 처음으로 가입까지 해가며 글을 썼다는 그의 악플이 뜨악하면서도 이해가 되는 시점에 다다랐다. 그의 삶이 불행한 것도. 내 글에 투영된 것도. 그래서 참을 수 없을 만큼 그 무언의 감정이 폭발한 것이 작가인 내 잘못은 아니지 않나. 단지 탓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무엇이 그를 화나게 했는지, 타자의 심리를 분석하는 나를 보며 사건을 바로 보는 시선과 본질을 다루는 결이 달라졌음 느낀다. 그래, 이제 써볼 만하겠는데?




작가에게 악플은 성장을,
선플은 날개를 달아준다.



'내 필명이 히읗인 이유' 글에서 히읗 작가님에게 쓴 댓글이다. 내 글로부터 내가 위로를 받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보내는 응원이기도 했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글을 쓰고 난 후 매번 심판대에 오르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좋아요가 몇 개 클릭되었는지 수시로 확인했고, 댓글에 울고 웃었다. 그러기를 4~5개월. 한 가지 깨달음이 스쳤다.


모두로부터 미울 수만도 사랑받을 수만도 없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있어 모두 백조다. 다만, 자신이 백조인 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삶=살아가다+알아가다



삶은 '살다'와 '알다'의 깊이에 따라 저마다의 색을 낸다. 글에서 풍겨지는 작가의 향기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글은 비 대면 소통방식이다. ‘악마는 뒤태에 있다’ 브런치 조정수 작가님의 말처럼 글은 어쩌면 뒤태 와도 같다. 감추려 하지만 뒤에서는 다 보이는. 향기와 발자국과 같이 채취를 남기기 때문이다. 익명이라는 가면에 자신을 가린 채 글에서는 웃는 척 하지만 독자들은 다 느낀다. 진실된 웃음인지, 거짓된 가면인지. 글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채취가 느껴지는지 알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면의 방식보다 어쩌면 더 민낯으로 다가서는 걸 수 있다.


처음엔 그 민낯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예쁘게 치장하고 포장했다. 엄청난 조회수에 놀랐지만 좋아요를 누른 횟수는 고작 3개뿐이었다. 마치 미인대회에서 ‘세계 평화를 위해 기여하겠습니다.’와 같이 말하는 느낌이었다. 독자들은 과연 이 사람이 세계평화를 위해 한 실제 행동이 궁금하지 미소와 화려한 어구로 한 껏 치장한 ‘가짜 뽕’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순히 안다는 것도 부족했다. 거장들의 어록과 심리학의 유명 이론들을 들먹이며 아는 척하는 것도 신물이 났다. 가면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민낯의 진짜 내 속 이야기를 하나 씩 꺼내서 쓰기 시작했다. 오히려 타이핑에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편안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타인의 시선에 구속받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지금도. 글로써 나를 알아가는 중이고 '진짜 백조'로서 당당히 날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 아직은 미운 오리새끼지만 이 시절의 나를 사랑한다.


살아가는 것과 알아가는 것의 차이에 따라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고 있다. 작가는 모두 살면서 알아가는 과정에 있고, 그 과정을 글로 담는다. 고뇌하고 신음하는 것은 나아간다는 성장이자 발자국이다. 삶과 앎이 맞닿은 시와 때에 비로소 글의 깊이가 풍만해지기 바라본다.


힘들다.
세상이 엿 같다.
휘청거리는 나를 지탱한 건 너덜 해진 구두 밑창이었다.


20대의 난 ‘힘들다’ 세 글자로 국한되어 있었다. 30대엔 ‘세상이 엿 같다’ 화풀이했다. 40대를 앞두니 ‘휘청거리는 나를 지탱한 건 너덜 해진 구두 밑창이었다.’ 나를 보듬고 위로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될 것인가?


알을 안에서 깨면 병아리지만, 밖에서 깨면 계란 후라이에 불과하다.


작가로서 어린 감정에 집중했다면, 알을 깨고 나와 이제는 벗겨진 구두창에 투영시킬 때이다. 굳이 힘들다 말하지 않아도 십 년을 견뎌온 구두만큼이나 험난한 내 삶을 대신 표현하리라. 이제는 내 안에 둘러싼 억압과 굴레를 깨고 나와 병아리가 되어야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구두 밑창에도 내가 있고

헐거워진 겨울장갑에도 내가 있다.

나와 일생을 함께해 온 몇 안 되는 물건들 속에서 내 삶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살갗을 파고드는 글 귀

영면하는 영혼을 붙잡는 글 귀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온 날 만큼이나

영겁의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다독거리고

방망이질도 해가며 손빨래를 해야만

비로소 깨끗하고 이물 없는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주름이 있다면 탈탈 털어버리는 추수의 작업도 하면 된다.


삶의 매 순간 매 고개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을 넘어서

그때의 나를 구원해야만 한다.

지금껏 살아왔다면

이제는 알아야 한다.

'아생 생식(芽生生殖)'과 '자아 득도(自我得道)'를 통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







2021년 1월 4일 쓰고

2021년 1월 29일 완성하다.

4:00 am '글로서 새벽을 여는 작가란 직업'에 관하여 통찰하다.


(故) 박완서 작가님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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