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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Jun 17. 2024

모르는 총각을 쫓아갔다




마스크를 쓴 얼굴에서 땀이 조르륵 흐르는 오후. 전철에 올라타는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 시원하게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 이지만 요즘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려 고통받고 있으니 에어컨이 꺼려질 것 같지? 아니다. 에어컨은 언제나 옳다.

룰루랄라 투석이 끝난 후, 감기약을 한 보따리 받아서 전철에 올랐다. 할아버지와 웬 총각 사이에 앉았다. 당연히 좌석 한 칸씩을 띄우고서. 종착역에 가까워 오는 이때는 전철이 정말 한산하다. 전철에 사람이 많았더라도 내가 타는 기역역에서 대부분이 와르르 내리므로, 코로나가 지나갔음에도 늘 거리 두기가 지켜지고 있다.

앉아서 얼굴에 흐른 땀을 식히며, 투석 이후 오늘의 계획에 대해 생각을 하며 정남과 카톡을 주고받던 도중 옆자리 총각이 백팩을 둘러메며 일어났다.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옆에서 누가 크게 움직이면 꼭 쳐다보게 된다. 흰 티셔츠에 연한 색 청바지, 하얀 스니커즈를 신은 그 총각은. 응? 관심 있어서 쳐다본 것 절대 아니다. 원래 타인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나에겐 소한이가 있다고요. 어쨌든 총각의 뒷모습을 보며, 칸까지 옮겨가며 내리다니 특이한 청년이구만 하며 시선이 좌석으로 돌아간 순간 지갑이다! 사실 떨어진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서 이동을 시키면 '점유물 이탈 횡령죄'에 해당하지만, 총각은 이제 막 열 걸음쯤 갔다. 지금 빨리 불러 세워야 한다. 나는 유럽의 소매치기처럼 매우 빠르게 좌석에 얌전히 누운 총각의 까만 지갑을 집어서 그를 쫓아갔다.

"지갑 갖고 가세요. 지갑, 지갑, 지갑."

그러나 그는 도통 뒤를 돌아보지 않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자꾸만 나에게서 멀어졌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를 부르며 쫓아간다. 그가 다른 열차칸으로 옮기려던 찰나에서야 나의 목소리가 그의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게 인사를 했다. 휴우 다행이다. 만약 내가 그의 지갑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가 전철에서 내린 후에 지갑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면 얼마나 속상했을 것인가. 지갑을 잃어버리는 것이 단순히 지갑을 잃어버리는 것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그는 지갑 속에 있던 것들, 카드와 현금 같은 자산에서 지갑을 선물해 줬을 누군가와의 추억까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더운 거리에서 속상해해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에게 지갑을 건네고 돌아서는데 마음이 뿌듯했다. 아무도 나를 칭찬하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를 도운 본능적인 나의 몸놀림을 나만은 똑바로 보았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원래의 자리에서 이미 많이 왔다. 그래서 총각에게 지갑을 건네고 뒤돌아, 대충 사람이 비어있는 좌석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왼쪽으로 세 칸 떨어진 지점에 앉은 할머니께서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말을 걸어오셨다.

"어떻게 지갑을 주워다 줄 생각을 했어요? 너무 잘하셨다."

"니 옆에서 일어나시고 우연히 봤는데 지갑이 딱 있길래 무조건 따라갔지요."

"아휴, 너무 고마워요. 나도 전에 카드 지갑 전철에서 잃어버렸거든. 물론 이렇게 바로 찾지는 못했지만, 어느 분이 주워서 역무실에 맡겨준 거야. 그래서 찾았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은 가방하고 얼마나 철저히 챙기는지 몰라. 제가 다 고맙습니다."

"바지에 넣어놨다가 빠진 걸 저분이 모르셨나 봐요. 아유 별말씀을요."

할머니는 지퍼가 꼭 닫힌 가방을 어루만지며 이야기하시다가, 가방을 뒤지기 시작하셨다. 뭔가 찾으시는 게 있는가 보다 하고서 나는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는데, 할머니가 몇 칸이나 다가오셨다. 그리고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미셨다. 하나님의 증인이 되고 싶어 하시는 신앙심 깊은 단체의 홍보 전단이었다.

"요즘 세상이 너무 악해졌어요. 그런데 이런 분이 있다니. 꼭 드리고 싶어서요. 이따 꼭 읽어보세요, 아가씨. 참 좋은 분이야."

사실 전도 당하는 것 굉장히 싫어하지만, 착한 일을 한 뒤라 그런가 얼굴 근육이 미소 상태로 굳어버려서 그냥 계속 웃었다. 할머니도 무척 뿌듯해하며 웃으셨다.

오늘 총각 하나의 기분을 살리고, 또 신앙심 깊은 할머니 한 분의 기분을 살리고, 나의 기분을 한껏 돋워주었으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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