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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달보름 Aug 24. 2022

얘, 애가 네 모유만 먹으면 설사하는데?

모유수유를 둘러싼 며느리의 고찰


 제목에 충격받아 글을 읽기 시작한 독자분이 있다면 이 문구를 어떻게 읽었을지 예상해 보게 된다. 첫째, 당연히 시어머니 음성으로 읽었을 것이다. 둘째, 모유 수유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셋째, 모유 수유 경험이 없다면 이게 대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일까 하며 당연히 시부모님의 목소리를 상상하고 들어왔으리라 감히 예상한다. 대한민국 며느리라면 ‘자연분만! 모유 수유!’를 외치는 사회 속에서 누구 하나 자유롭지 못했으리라. 오죽하면 드라마 ‘산후조리원’에서는 쌍둥이를 자연분만하고 완모(완전 모유 수유)까지 성공한 박하선을 모든 조리원 맘들이 찬양할까? 많이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연분만 모유 수유를 하는 사람이 ‘좋은 엄마’라는 틀은 완전히 깨지지 않았다. 첫째를 낳고 조리원에 입소했을 때 드라마 ‘산후조리원’에 나왔던 박하선 같은 엄마가 아직도 생각난다. 무통 주사를 한 번도 맞지 않고 진진통을 견디며 아이를 출산한 것, 임신 기간 중 휴대폰을 최대한 멀리하며 전자파로부터 내 아이를 지킨 것, 엄마 젖을 먹고 아이가 쑥쑥 커서 ‘참젖’ 부심이 있었던. 절대 비난하진 않지만 참 신기했다. 여전히 내가 사는 세상에도 오로지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이 중심으로 생활을 바꿀 수 있는 그 사람이 대단해 보였다. 그런데, 오, 신이시여 그런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인가요? ‘산후조리원’을 봤을 땐 누가 우리 조리원을 사찰한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박하선이랑 똑같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 보다 강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첫째 엄마는 절대로, 아무도, 누구도, 말릴 수 없다는 것이다. 나만 사랑하며 살아왔던 지난날이 무색하게 첫째 아이를 낳자마자 나는 어렵게 자연분만했지만 ‘모유 수유’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에 빠졌다. 가슴 크기와 달리 유선은 매우 복잡해서 크든 작든 모유가 도는 양은 차이가 있다고 했는데, 저기 선생님... 그건 혹시 저를 위한 위로일까요? 왜냐면 가슴이 작은데 모유도 적게 나오고 있거든요...? 혹시 가슴이 작다고 상심하지 말라는 위로일까요, 모유가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일까요? 어떤 위로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양쪽 다 상처받는군요. 완분(완전 분유)으로 갈 것인가 혼합수유를 한 것인가 결정해야 하는 타이밍에 완전한 모유 수유를 외치는 박하선과 같은 엄마 옆에서 완분을 결정하는 것은 나의 자존심에 매우 큰 스크래치를 내는 것과 같았다.


 게다가 조리원에 방문해서 아이 얼굴을 보자마자 “얘, 엄마 젖은 먹냐?”라고 물어보던 시가 식구들의 말에 묘한 자존심이 발동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말은 어머님의 도발이었다. “나는 우리 애들 키울 때 젖이 펑펑 나왔었는데, 아기가 엄마 젖을 먹어야지. 어쩌냐...” 이건 분명 나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아이를 향한 연민이었다. 그걸 머리로 알면서도 미쳐 날뛰는 호르몬은 A-B가 아닌 A-E로 생각 회로가 돌아가게 조작했고, 감히 도전받았다는 생각에 모유 수유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작은 내 가슴을 쥐어 짜내어 내 작고 소중한 첫째 아이에게 젖을 물리리라 다짐했다. 유명하다는 오케타니 마사지도 여러 번 받고 미역국(한국에서 젖 도는데 좋다는 음식)과 오트밀(미국에서 젖 도는데 좋다는 음식)을 섞은 괴식을 들이키며 완모의 꿈으로 다가갔던 나는 분만 도중 다친 꼬리뼈의 여파와 혼합 수유로 심각한 수면 부족에 시달리며 100일이 안 되어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런데 분유를 먹이고서야 그동안 했던 고생이 헛되게 느껴졌고, 남편이 제발 이제 분유만 먹이자고 부탁했는지 그의 마음마저 이해가 갔다. 이렇게 쉬운걸. 분유 먹이고 나는 이렇게 편히   있는걸.  나오지도 않는 젖을 유축기로 짜며 잠을 줄이며  짜증을 아이에게 토해냈을까. 나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나쁜 엄마가 되었구나(자기 검열 멈춰). 아무도 말릴  없었기에 오롯이 혼자 견뎌냈던 지난한 첫째 육아가    지나고 나서, 아이는 아무것도  하는 우는 인형에서 점차 말귀 알아듣는 반려 강아지처럼 자라났고,  무렵 나는 둘째를 임신했다(둘째 임신은 어떤 경위로 했는지는 , 제발 묻지 마세요..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둘째가 생겼다는 것은  나는 경력자가 되었다는 의미! 출산도, 육아도 이제 두려울  없다 이거야!!      


 첫째 때 날뛰는 호르몬을 감당 못하고 틈만 나면 흑흑 울어댔던 나였는데, 이제는 그 호르몬의 변화를 예측하고 남편에게 경고했다. 경력은 정말 무섭다. 경력은 나에게 “자기야, 기억나지? 나 아기 낳으면 미친 x 되는 거. 기억해. 서운해하지 말고 달래줘야 해!”라는 정도로 말할 단단함을 선물해 주었다. 남편의 눈빛은 ‘아니 또, 그날이 온다고?!’였지만 그 역시 과거 경험이 있는 경력자였기에 두 번째 다가올 무시무시한 시간을 우린 함께 견뎌 나갈 힘을 얻었다. 첫째 때 딱 한 번 맞고 견디던 무통 주사를 이번엔 가볍게 두 대를 맞고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출산한 다음 먹은 미역국을 모두 토해내는 무통 주사 부작용을 겪었지만, 한 번 더 하라고 해도 무통 주사 부작용을 다시 겪고 말지 진진통을 느끼고 싶진 않았다. 회복실로 올라가면서 직감적으로 가슴이 부풀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아, 둘째라 유선이 좀 뚫렸나? 수십만원 들였던 오케타니 효과가 이제야? 이 년이 지난 이제야? 거참, 효과가 좋네! 밤마다 젖몸살이 오기 전에 유축을 해야 했고, 처음부터 완분을 하고 싶었지만 나오는 젖을 말릴 수는 없었기에, 그리고 초유는 그 무엇보다 좋다는 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조리원에 있는 동안만 초유를 먹이기로 결심했다.      


첫째와 다르게 둘째는 조리원에서 황달을 얻었다. 작고 귀여운 신생아 얼굴이 누렇게 떠 있는 모습을 보니 달덩이가 따로 없었다. 아니 보름달 빵이라고 해야 하나? 조리원 선생님은 이럴 땐 모유를 먹이는 대신 분유를 많이 먹여서 빨리 황달기를 빼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      


“그럼 제 소듕한 모유는 어쩌죠. 선생님..?”


“얼려두면 되죠. 모유 팩 가져오셨죠?”     


챙기지 않을 리 없었다. 나는 경력자니까. 필요한 모든 것은 다 내 가방에 있었다. 새벽 2시마다 차오르던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첫째 때 그렇게 나오라고 고사를 지내던 모유가 펑펑 도는 걸 보며 아쉬운 마음이 들었고, 유축기를 양옆 가슴에 대고 처량하게 앉아 있는 거울 속 나를 보니 이 짓을 또 하네 싶어 넌더리가 나기도 했지만 모유는 죄가 없었다. 그동안 조리원에서 1일 5식을 하며 먹은 건강식으로 나온 영양가 많은 초유. 이 초유를 기필코 황달이 빠진 딸에게 먹이며 아들에게 모유를 제대로 먹이지 못한 마음을 달래리라. 모으고 모은 모유가 퇴소할 때쯤 꽤 양이 되었다. 집에 가자마자 짐을 풀고 가장 먼저 냉동실에 차곡차곡 보관했다.      


첫째 아들 때 온전히 남편과 내가 아이를 양육했다면, 둘째 딸은 어머님께서 직접 우리 집에 묵으시며 돕기로 하셨다. 어머님은 훌륭한 돌봄 노동자다. 조리원에 계시는 선생님만큼 말 못하는 아이들에게 공감하고 아이들이 필요한 것을 금방 캐치하신다. 그런 시어머님은 평생 무뚝뚝한 두 아들만 키워 오셔서인지 태어난 딸을 크게 반가워하셨고, 작은 신생아를 돌보는 것 역시 자처하셨다. 한 달 정도 내 몸이 회복될 때까지만 아이를 함께 돌보시겠다고 오신 어머님과의 첫 번째 동거가 시작되었다. 젖을 말리겠다고 일부러 모유를 먹이지 않았던 나는 집에 오자마자 바로 분유 수유를 시작했고, 가끔은 새벽에 어머님이 나 대신 수유를 해 주시며 나는 신생아 양육자에게 꼭 필요하다는 통잠을 잘 수 있었다. 냉동실에 꽉 차 있는 초유를 녹여 수유하던 어느 날, 어머님은 아기의 기저귀를 확인하시며 말씀하셨다.      


“얘, 이상하게 네 젖만 먹으면 애가 설사해. 똥꼬 있는 쪽이 다 벌겋게 발진이 나. 이거 그냥 버려~”


“모유 먹으면 원래 설사하는데요?!”

     

대꾸는 했지만, 사실 난 당시에 저 말을 들었을 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좋았다고 해야 할까? 남들은 젖 타령하는 시부모님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는데, 어머님은 내 젖을 먹으면 아기 똥이 물똥이 되니 먹이지 말라니 이 얼마나 분유 수유 할 완벽한 구실인가 싶었으니까. 첫째 때 도발하셨던 어머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버리라니? 오예~~?! 나는 그 즉시 모유를 모두 폐기했다. 가끔 새벽에 아이를 안고 분유 수유를 하고 있으면 젖이 차올라 흘러내리는 경험을 하긴 했지만 이주하는 동안 텀을 두며 서서히 짜내고 말리고 짜내고 말리고를 반복하며 모유를 끊을 수 있었다.

     

훗날, 어머님의 말씀이 누군가에겐 엄청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양육자 여성 모임에서 모유 수유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되었다. 경력자가 아니었던 초산, 즉 첫째를 출산해서 호르몬이 날 뛰었을 때 같은 말을 들었으면 나는 어떻게 해석했을까? 아마도 내 젖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하는 말로 해석했겠지. 여성 모임에서 모유 수유를 경험한 사람 중 누군가는 꼭 수유하는 데 문을 열어 두고 시어머님이 지켜보게 환경을 조성해야 했다고 했고, 누군가는 ‘젖이 상했다.’라는 폭력적인 말을 들으며 당신이 대신 분유를 먹일 테니 엄마는 빠지라는 말을 들었다고도 했다. 모유는 출산 후 아이와 엄마를 잇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그 과정에서 왜 가부장제 속 폭력에 아무렇지 않게 노출되는가? 모유를 먹이든, 먹이지 않든, 얼린 초유를 내다 버리든, 버리지 않던 모든 것은 양육자의 선택이자 더 나아가서는 아이를 출산하고 모유수유의 권한이 있는 여성의 선택이다. 간혹 시아버지와의 갈등이 모유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글들도 맘카페에서 본 적이 있지만, 이 주제를 중심으로 갈등하는 사람은 대체로 시어머니와 며느리다. 나 역시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시어머니의 말과 목소리가 생경하게 떠오른다. 그만큼 서로 예민한 문제이지 않았나 싶다.    

  

우리의 동거의 역사는 이때부터다. 분유를 나누어 먹이며 서로의 새벽을 공유하고, 서로의 양육을 공유하며 양육을 도우면서. 훗날 이 역사가 나와 시어머님의 발목을 잡을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신생아를 능숙하게 돌보는 어머님의 스킬에 나는 마음이 빼앗겼다. 비록 모유 수유로 상처 주는 말을 몇 번 하시긴 했지만, 어머님의 돌봄 스킬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버렸다.      


‘우리 어머님 짱인데? 아이들에게 좋은 양육자이자 할머니가 되어 주실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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