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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달보름 Aug 26. 2022

이제는 일하러 가야 하는데

이런 비루한 몸뚱이를 극복할 것은 일 밖에 없어!

이제는 일하러 가야 하는데     


 첫째 아이를 출산하고 힘겹게 견뎌낸 시간은 우울 그 자체였다. 항상 밝고 명랑하고 긍정적인 성격을 가진 나에게 빠져나오기 힘든 우울의 시기가 왔던 때는 크게 세 번 정도 있는데, 그 어떤 시기보다 출산 후가 가장 지질했을 때라 이 연사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호르몬 탓이지 내 탓이 아니라 무한 핑계를 대고 싶지만 사회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송글 송글 피어나는 열등의식과 피해의식, 낮아진 자존감은 우울이라는 알 수 없는 어두운 형태로 변모했고 육아를 하는 도중에 울컥울컥 튀어나오는 한(恨)은 원통함이나 분노보다는 지질한 형태로 드러난다. 가장 큰 이유는 우선 거울을 보면 알 수 있다. 언제 빨았는지 모를 젖 냄새가 나는 잠옷 위에 얼룩덜룩 묻힌 아기의 토사물 자국, 10달의 임신과 출산 후 모유를 위해 여물을 먹는 소처럼 미역국을 사발로 드링킹 한 후 남은 것은 아아, 뱃살뿐이구나. 귀여운 뱃살도 아닌 셀롤라이트가 우글우글 보이는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뱃살. 화장기 없는 자연인 피부는 푸석푸석해졌고 100일 무렵 아기의 배넷머리와 함께 빠지기 시작한 머리는 잔디인형처럼 올라왔다.      


‘나, 너무 못생겼어... 어엉어엉어어엉어엉’     


 그렇다. 산후 우울증은 시도 때도 없이 울컥하지만 거울을 보면 특히나 더 울컥한다. 배가 불러올 때 만해도 단정하게 차려입고 다니던 사회인 같은 나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 그야말로 말할 수 있는 짐승 같은 느낌이랄까?      


 남편은 공동육아에 꽤 참여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오는 8시부터 밤 12시까지는 남편이 아기를 돌봤고, 나는 그 시간에 쪽잠을 자며 밤 새 근무할 전투태세를 갖추기도 했다. 밤새 지쳐서 자는 나와 아기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깨우지도 못하고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감은 두 눈으로 보지 않고도 느끼며 나는 질투했다. 아내 대 남편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질투가 났다. 아이는 똑같이 만들었는데, 나는 무보수로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힘든 육체노동을 하고 있는 반면에 남편은 말끔하게 씻고 차려입고 아침에 출근을 한다. 미웠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남편뿐만 아니라 세상이 밉고 짜증 났다. 출산 후 망가져 버린 몸과 피부와 탈모는 둘째치고 이 모든 것은 정당하게 일을 하고 보수를 받을 수 있다면 극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이해가 안 간다면 이해해달라고 호소하고 싶다. 원래 출산 후에는 로고스 따윈 없다. 로직도 논리도 없다. 그저 세상에 가장 불행한 여성이 있고 그게 나라고 착각할 뿐이다.


소화가 잘 안 되어 먹은 분유를 분수토 했던 아기를 키우며 밤새 왼쪽 어깨에 낸시랭 고양이처럼 얹혀 놓고 토닥토닥하고 있던 내 눈빛에 영혼이란 게 있었을까? 그 시기에 우울하게 보냈던 기억은 내 과거에 대한 후회라기보다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후회로 남기도 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기가 행복하다는데. 나는 충분히 행복할까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결혼 후 프리랜서로 일을 이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고정적인 밥벌이가 불가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기만 안고 집에서만 살아가는 일은 내 썽에 도저히 차지 않았다. 격렬하게 일을 하고 싶었다. 나가서 단 십원을 벌더라도 내 손으로 일해서 받은 돈으로 내 가치를 증명하고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전업 주부로 사는 것이 무급이었기에 나에게 의미가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심각하게 복직을 고민했고 어머님께 일시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SOS를 쳤다. 첫째 때에 살던 곳은 넓은 곳이 아니었기에 어머님이 자주 와 계시진 않았다. 다만 포기할 수 없는 일이 들어올 경우 어머님이 올라오시는 기간에 스케줄을 잡았고 나도 일정을 그 기간에 집중적으로 잡으면서 아기가 9개월 될 무렵 복직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복직 3개월 차에 또 둘째가 생겨버리긴 했지만, 둘째를 임신했을 땐 막달까지 충분히 일할 수 있었다. 어머님의 도움은 물론 첫째 아이가 드디어 어린이집에 가게 되었기 때문에 찾아온 자유이자 일탈이자 내 자아로 돌아가는 과정.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에 ‘요즘 그렇게 아동학대가 많대!’라며 걱정했던 나는 온 데 간데 없이 첫째를 적응시키고 보육 시간을 늘려가며 ‘오, 어린이집 선생님은 나의 구세주다!’라 생각했다.      


 배가 불러올수록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은 걱정에 잠이 와도 생각에 잠겼고, 미래에 대한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머릿속에 뒤엉켜 풀릴  없는  뭉치가 되어 이리저리 왔다 갔다 나를 괴롭혔다. 충분히 일을 하고 있고 충분히 복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를 출산하기 전까지 불안하고 조급했던 마음이 생겼던 이유는 둘째 양육으로  생겨버릴 경력의 공백이다.  번의 출산과  번의 공백, 게다가 프리랜서. 이런 나를 사회에서 받아주기나 할까? 경력자의 마음으로 약간의 마음속 여유 공간이 생겼지만 여전히 조급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어린 30 초반의 나는 둘째 출산 직후 컨디션 회복 이후 빠르게 복직할 계획을 세웠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울타리를 치고 나를 가두며  불행을 아이들에게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불행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복직이며 나를 위한 커리어 설계라는  알기에, 최대한 빨리 복직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 둘을 두고 복직하려면 어머님이 계셔야 하는데? 둘째가 아무리 빨리 어린이집에 간다고 한들, 그전에 일을 하려면 나는 어머님의 도움이 필요한데? 어쩌지?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4시간 거리에 계시는 어머님을 모셔 올만큼 완벽한 논리나 설득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님이  계신 공백 동안 나는 종종 유아 돌봄 서비스를 신청해서 아이를 맡겨두거나  급할  친정엄마에게 SOS 치며 일을 했었다. 이것 또한 불안했다.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외줄 타기 같았기에.      



‘아 일 하고 싶다. 진짜 진심으로 격렬하게 일하고 싶다. 어머님 보고 싶어요. 진심으로 문자 그대로 보고싶어요.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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