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달보름 Aug 29. 2022

시어머님, 제발 도와주세요! 헤협 미!

마침내, 진짜 워킹맘과 시맘의 동거가 시작되었구나!

 내 팔뚝만 했던 작디작은 아기를 척척 안고 소중히 씻기고 분유 수유를 했던 어머님의 손길이 떠올리면 돌봄 노동자를 고용해 아이를 맡기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어머님의 도움을 받아 꺾여버린 날개를 펴고 훨훨 나는 꿈. 나는 어머님이 필요했고, 복직에 어머님 도움은 절실하다 못해 필수적이었다. 그가 없으면 내가 감히 일할 생각은 꿈도 못 꿀 것만 같았다. 아기가 태어난 2018년 하반기 무렵, 나와 남편은 두 발을 싹싹 빌어서라도 시어머님을 모셔 오기로 다짐했다.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은 주로 남편이 담당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나와 어머님 사이엔 사회적 거리가 존재했기에 오해가 생길 여지가 있어 남편에게 부탁했다. 여전히 사적인 대화를 나눌 때 어머님과 나의 사이에 있는 공간을 쉽사리 좁힐 수 없다. 뒤에서 글을 쓸 날이 오겠지만, 어머님과 함께 사는 만 4년 동안 여전히 그러하다(가끔 어머님이 날 딸처럼 대하는 것 같긴 하지만..). 남편은 어머님을 비롯해 아버님과 긴 통화를 끝내고 어머님이 흔쾌히 우리가 있는 집으로 오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전했다. 확답받자마자 어머님과 아버님께 감사 인사를 각각 전해야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님께 감사 인사 전하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신기하다. 우리 세대가 나이 들어도 과연 그럴까 싶은 중년 남성들의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그것이다. 아버님뿐만 아니라 우리 친정아버지도 그러한데, 60이 넘은 남성들은 항상 아내를 필요로 한다. 평생을 옆에서 돌봄을 했던 아내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아이처럼 퇴화하는 것 같다. 여기서 항상 의문이 드는 점은 아버님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보다는 항상 귀찮고 짜증 내면서 안쓰러워하는 어머님들의 마음이다(우리 친정엄마 포함). 아마도 대한민국의 모든 개 딸 포함 개아들들까지 중년의 어머님이 투정 부리는 이 장면은 익숙할 것이다. 


 

 “하여간, 온종일 누워 있기만 하고 기운도 없이 저러고 있다 정말. 뭘 하라고 해도 하지도 않고 말이야. 그래도 엄마가 일찍 가야지, 엄마 없으면 밥이라도 잘 챙겨 먹을까? 가서 밥은 차려 줘야지.”


 “세상에에~ 몇 달 만에 집에 갔더니 집이 얼마나~~~더러운지 그거 청소하느라 허리 나가는 줄 알았어~~~~(어머님은 충청도 분이시다).”



 어릴 땐 이런 엄마(들)의 모습이 싫었다. 싫다면서 왜 살아가는지, 왜 아빠(들)에겐 말하지 않고 나에게 와서 힘듦을 토로하는지, 내가 감정의 쓰레기통인지, 듣기 싫은 이야기를 왜 무한으로 반복하는지. 한 번은 엄마에게 ‘그럴 거면 그냥 이혼하지 왜 지금까지 살고 있어?’라는 말로 비수를 꽂았던 적도 있다. 그땐 엄마가 그렇게 시원하게 얘기해줘서 고맙다고 했지만 몇 년 뒤 다시 그 이야기가 나왔을 땐 달랐다. 엄마가 어떻게 너희 셋(세 남매)을 키웠는데,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냐고. 그 말조차 이해되지 않았던 철 없던 나는 아이를 낳고 조금은 소프트해졌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로 살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엄마는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거구나. 엄마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건 옳지 않구나. 내가 비수를 꽂았던 것도 모자라 장검을 꺼내서 엄마의 심장을 베어냈구나 싶어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어머님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딸이 없었을 뿐이지 아들들에게 항상 비슷한 말을 했던 히스토리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무뚝뚝한 큰아들은 의미보다는 소리로 꽂힌 그 말들을 무심히 떨쳐 냈을 것이고, 조금 더 다정한 작은 아들은 ‘아이고, 엄마 그랬어?’라는 다소 뻔하지만 최선을 다한 공감으로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그런 어머님의 마음이 조금은 안쓰러워 훌라후프만 한 사회적 거리가 존재하는 우리 사이지만 가끔은 어머님의 과거를 캐며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어머님과 친해지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그래서 잘 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사이가 어떤지, 외줄 타기 같은 겹겹이 쌓인 40년 정도의 사이에서 어머님이 얼마나 무수한 참을 인(忍)을 몸 구석구석 세기며 버텨 왔는지. 그런데도 내가 왜 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인사해야 하는지 역시 이제는 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200km가 넘는 고향에서 어머님을 보내면 혼자 남아 텅 빈 이층집을 지키는 아버님의 마음이 얼마나 쓸쓸할지도 짐작이 갔다. 



 허나 그런 것들은 모두 다 내 마음속에 10% 정도 밖에 차지하지 않는 걱정이었다. 죄송하고 염치없는 마음도 있지만, 일단은 내가 살아야 했다. 조금 더 뻔뻔해지면 어떤가? 조금 더 숙이고 들어가면 어떤가? 일단 복직하고 임신 출산으로 경력단절에 있는 여성들이 흔히 겪는 최대한 버티기의 시간을 약 2년에서 3년 정도 겪고 나면 그땐 쿨하게 어머님을 보내드릴 수 있지 않을까(응, 헛된 꿈)? 멋진 커리어 여성이 되어서 어머님께 두둑한 용돈을 챙겨드리며 ‘어머님, 감사합니다. 감사는 돈으로 갚겠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지 않을까(응, 헛된 꿈2)? 흔쾌히 도와주시러 오시겠다는 어머님께 마음 깊은 감사를 드렸다. 한동안 어머님께 두둑한 용돈을 챙겨드릴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저자세로 함께 나아가 보자. 



 어머님이 오실 무렵 우리는 서재 하나를 정리했다. 방 3개에 화장실 2개인 집이지만, 평수로는 사실 5명이 살기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님께 방 하나를 내어 드리는 것이 돈 없고 힘없는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예우였다. 어머님이 요구하셨던 것들은 침대, 옷장, TV. 옷방에서 옷장 두 개를 정리해 붙박이를 제거하고 어머님 방에 옮기는 대공사를 했고 어머님이 직접 초이스하신 에이스 침대와 함께 침대 밑에 선반에 올려 둘 작은 TV까지 구비했다. TV는 물론 실시간 채널이 시청할 수 있는 케이블도 연결해 두었다(다행히 (?) 넷플릭스는 아직 보실 줄 모르신다). 그럴싸한 방을 만들어 두었더니 이제야 시어머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스타트를 끊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머님은 시골에서 우리 집으로 거의 이사를 오셨다. 한 날은 용달차가 왔는데, 용달에는 어머님이 안 계시면 무용지물이 되는 구입한 지 얼마 안 된 김치냉장고(당시 우리 집엔 김치냉장고가 없었다)와 어머님의 손때가 닿은 프라이팬과 칼, 각종 그릇을 포함하여 사계절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옷가지들과 숀 리 바이크까지 등판했다. 김치냉장고가 너무 커서 냉장고를 들이려면 안방의 창문으로 지게차를 올려야 했고, 그야말로 대공사가 시작되었다. 아, 그럴싸한 방이 아니라 이삿짐이 날라지는 과정을 보니 정말 피부로 실감이 난다. 난~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결혼도 마찬가지지만, 과연 내가 잘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이 두 번째로 가득했던 순간이다. 



마침내, 진짜 워킹맘과 시맘의 동거가 시작되었구나! 


이전 03화 이제는 일하러 가야 하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