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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달보름 Aug 31. 2022

이 정도면 딸 같은 매누리 맞죠?

딸 같은 며느리의 이상과 현실

 어느 날 커뮤니티에서 ‘우리 엄마 <알토란> 좀 못 보게 해주세요.’ 와 같은 글을 본 적이 있다. 이유는 건강 관련 채널에서 뒷광고로 홍보하는 건강관리 식품을 어머님들 보시고 하나씩 하나씩 포켓몬 모으듯 사 모은다는 것 때문이었다. 댓글에도 우르르 ‘우리 엄마도 못 보게 해주세요.’ 와 같은 글들이 많이 보여 피식 웃음이 났다. 우리 집 찬장에 건강식품이 몇 개더라? 풋사과, 노니 가루, 렌틸콩, 병아리콩 등등 기억나지 않는 가루는 그보다 더 많았다. 여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우리 어머님도 트로트를 사랑하고를 <미운 우리 새끼>를 즐겨보는 흔하디흔한 중년 여성이다. 요즘 예능 관찰 프로그램에서 주로 나오는 고부간의 갈등은 우리 세대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유쾌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기존 가부장제에 순응하며 살던 어머님들에게 또 다른 눈치를 가지게 하기도 한다. 우리 어머님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 보니 ‘요즘 매누리(충청도식 어머님 발음이다)’에 대한 이야기도 가끔 하신다. 요즘 매누리들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빠삭하게 파악하고 계시면서 싫어하는 일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 노력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을 보면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으며 중년 이후의 성인은 더욱 변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과거의 내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어머님은 당신 나름대로 최대한 나에게 맞추려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어머님과 우당탕 동거가 시작되었을 땐 불편했다. 사실 편하게 지낼 수 없을 만한 지금은 훌라후프 만해진 사회적 거리의 3배 정도 되는 거리가 있었기도 했고, 직전에 언급했던 허리디스크 수술 간호 이벤트와 시가에서 커튼 빨기 이벤트가 결혼 전에 있었기에 어머님을 어떻게 대해 드려야 할지 막막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안 나는 많이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속에서 살아 내면서 버틴 시간은 페미니즘에 대한 ㅍ도 몰랐던 나를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모두 옳지 않다는 느낌, 어딘지 모르게 간지러운데 어디가 간지러운지   없는 께름칙함. 바꾸고 싶은데 무엇부터 뒤집어엎어야 할지 모르겠는 황망함. 남편은 꽤나 다정한 사람이다. 화를 내는 임계점이 높고 (한번 내면 장난 아닌  문제긴 하지만) 여유 있고 양반 같은 성격이라 조급한 나와는 천상 다른 기질을 가져서 결혼하며 서로의 완급을 조절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파트너였다. 집안일, 육아 역시 함께 참여하는 편이라 주변에서는 ‘ 정도남편이면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니? 그때마다 2002 월드컵 주역인 히딩크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니,  아직 배가 고프다.’ 나는 배우고 있고 그는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이에 이미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역할 갈등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럴  내가 비유를 드는 예는 영화 <82년생 김지영> 남편 ‘공유. 얼굴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복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아내를 위해서 기꺼이 육아휴직을  용기가 있는 남성. 아내의 건강을 위해 희생할  있는 남성. 사람들은 그를 보고 대단하다 했지만, 눈치가 빠른 관객이 있다면  것이다. 빨래 개는 지영의 옆에서 맥주를 ‘따서 혼자 (?)먹고 있는 공유(  대현) 모습! , 대현이  새ㄲ... 마찬가지로 의식은 하지만 의식하지 못해서 여전히 변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남편도 그랬다. 하나하나 알게 되기 시작하니 사소한 것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페미니즘에 처음 눈을    역시 화가 많았다. 작게든 크게든 반항하고 목소리를 내야 누구든 들어  것이라 생각했다.      


 며느리로서 해야 할 역할도 그랬다. 예전처럼 순응하는 며느리가 아닌 요즘 며느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아아, 어리석은 자여. 결혼 전에 그렇게 순딩이처럼 며느리 코스프레를 해 놓고 이제 와서 갑자기 못된 며느리가 되겠다?! 그라데이션이 아닌 경계선을 긋겠다? 말했듯 당시 나는 화가 많았다. 문자 그대로 눈에 불을 켜며 ‘피할 수 없는 것들을 부딪쳐 바꾸자!’라는 마음으로 싫은 건 싫다 힘을 주어 말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있었다. 그 무렵 가여운 어머님이 우리 집으로 이사를 오신 것이다. 숀 리 바이크와 함께 등판한 각종 살림살이를 정리하면서도 어머님은 내 눈치를 보셨다. 애초에 미니멀리스트를 추구하는 맥시멀리스트인 이율배반적인 나는 집에 어머님을 모시면서도 어머님 살림이 얼마나 올지 두려움에 싸여 있었고, 그걸 눈치챈 어머님이 용달차가 다녀간 다음 날 모든 물건을 눈에 띄지 않게 정리해 두셨다.


“많이 가져왔다고 뭐라 할까 봐 다 정리해서 넣었어~”      


 물론 다 넣은 것은 아닐 정도로 구석구석 내 물건이 아닌 것들이 쌓이면서 내 스트레스 역시 쌓여 갔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뭘 그리 야박하게 굴면서 어머님을 눈치를 보게 했는지 참으로 싹퉁바가지 며느리가 아니었나 싶다. <거침 없이 하이킥>의 박해미 저리 가라다, 그는 능력이라도 있지, 난 뭐가 있었나? 눈에 불만 있었지 참. 쥐뿔도 없어서 싹퉁바가지 이상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변명하자면, 화가 난 마음 반과 어머님과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 반이 공존했다. 어머님을 ‘모시는’ 입장에서 ‘함께하는 시간’으로 생각하자는 마음이 커지기도 했다. 어차피 함께 살아야 하니 어려워하다 보면 나도 이 시간이 불편해질 것이 뻔했기에, 조금 뻔뻔한 며느리 코스프레로 진짜 그렇게 살아보자는 마음... 은 사실 변명에 불과할까? 모르겠다. 4년 전의 내 마음이 과연 어땠을지는.     

 한번은 요가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예능 프로에서 연예인 패널 몇몇이 나와 ‘딸 같은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화가 많은 나는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보면서 기가 막혀 저딴 얘기가 과연 현실에 가당키나 한지 옆에 있는 남편에게서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었다. 남편은 내 얘기를 들어주다가 갑자기 주방에 눈짓하며 ‘여기 딸 같은 며느리가 있네~’라고 했는데, 스트레칭하면서 등을 돌려 뒤를 돌아 본 나는 어머님이 여태껏 설거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눈치채 버렸다. 아... 내가 진짜 딸 같은 며느리인가? 설거지하는 어머님을 두고 감히 요가 매트를 펴고 스트레칭한다? 이게 대한민국 고부 사이에 가당키나 한 걸까? 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 어머님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 안타까움이 동시에 모락모락 피어나면서 정확히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애증 같은 것이 생겼다. 앞으로 어머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성장해야 할지도 더욱 까마득했다.      


 어머님에게는 다행 나에게는 약간의 불행으로 우리 집에서 동거가 시작되었을 그 무렵 그에게 지독한 갱년기가 찾아왔다. 아침에 비가 오는 창밖을 내다보며 멍하니 서 있던 공허한 어머님의 눈빛과 어디가 아픈지 여쭤보면 아픈 데는 없다고 말하는 거짓말 같은 답변에 힘들었던 친정엄마의 갱년기가 문득 떠올랐다. 어머님, 제발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때마다 억지로 누르고 눌러 다시 삼키기를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님께 신경 좀 더 쓰는 게 어때?’라고 면박(을 가장한 협박)을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서인지 어머님과 동거 초반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한동안 흘렀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나대로,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예민했었던 시기. 딸이 없어서 서운하셨던 어머님께 요가 매트를 피고 운동하는 싹퉁바가지 며느리는 할 수 있는 감정적인 위로를 해 드리자 다짐했고, 약국에 가서 갱년기에 좋다는 달맞이꽃으로 만든 영양제도 사드렸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렇게 인생의 한고비를 관통하며 따로 또 같이 성장하고 있었다.      


딸 같은 며느리는 싫지만, 딸처럼 대해 드리며 살자. 우리의 시간을 공유한다 생각하고. 그것이 우리의 동거 시작에 내가 했던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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