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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은 Oct 25. 2024

비밀스러운 순간

A씨는 어머니와 둘이 산다. 내가 출퇴근 활동지원을 하기 전까지 계속 어머니와 둘이 다녔고, 삼십 여년 간 주보호자였으니 어머니와 A씨의 관계는 상당히 끈끈하다고 할 수 있다. 오랜 돌봄과 의존 관계로 엮인 사이가 끈끈하다고만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퇴근하고 나면 A씨는 자주 어머니의 미용실에 가서 앉아 있다가 온다. 그냥 앉아 있기도 하고 과일을 먹기도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고, 일을 나가지 않는 나머지 시간에는 집에서 쉰다. 운동은 때때로 개천길 걷기 정도.  벌써 십여 년째 이어진 루틴. 발달장애인은 변화된 상황에 취약하기 때문에 고정된 루틴을 잘 유지하는 것이 안정감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한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몇십 년간 유지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세상이 늘 새로운 이벤트, 더 향상된 변화를 요구하는 것만 같을 때 이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초조함이 조금 덜어지는 기분이다. 평화는 이런 일상의 반복에 있는 것이라는 느낌.

어머니는 A씨가 운동을 열심히 해서 아픈 고관절을 잘 치료하기를 바란다. 회사에도 잘 나가고, 체중도 잘 조절하고. 매일 A씨를 위한 다이어트 허브차를 준비해놓는 것도 어머니의 주요 일과다. 

A씨는 내게 무얼 해줬으면 하는지 큰 요구가 없기 때문에 내 활동지원은 주로 보호자인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다. A씨나 B씨 모두 본인보다는 보호자 요청대로 지원했던 걸 보면 발달장애인의 특성 상 이런 식으로 활동지원사의 업무가 정해지는 듯 하다. 물론 요청받는다고 해서 내가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시킬 수는 없다. 양치나 운동처럼, 보호자가 시켜도 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내개 따로 요청하는 것이기도 할 테고 말이다. 

활동지원사가 보통 보호자의 일을 대신하기는 하지만, 보호자의 대체제는 아니다. 어머니와 A씨에게는 둘 만의 관계가 있다. A씨는 어머니와 같이 출근할 때는 손을 잘 잡지만 내 손은 잡지 않는다. 어머니는 A씨와 내가 서로 언니 동생하며 가족처럼 지내길 원하지만, 사실 내 느낌 상 그런 친밀한 관계는 우리 둘 다 별로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아무려나 나와 A씨에게도 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관계가 있다. 꼭 가족같지 않고, 아주 친밀하지 않을지라도. 같은 출퇴근 길이라도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그런 관계.

운동은 A씨의 어머니가 늘 원하는 것이지만 통증을 이유로 A씨는 거의 운동을 하지 않는다. A씨의 어머니는 그럴 때면 등을 떠밀어서라도 나와 함께 산책 나가도록 하는 편이다. 그러면 인상을 찌푸리고 이십 여분 정도 걸은 뒤 다시 집에 돌아간다. 

어느 날 A씨는 퇴근 길에 매일 지나는 공원에 멈춰 섰다. 늘 쌩하니 지나치던 곳이었다. 나는 별말 않고 뒤따라갔는데 공원에 있는 운동 기구를 하나하나 열심히 하는 게 아닌가! 공중 걷기부터 어깨 운동까지 알차게 했다. 한참 한 뒤 A씨는 벤치에 앉아 숨을 골랐다. 

어머니가 알면 엄청 좋아하시겠다! 전에 없던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A씨는 옆에 앉은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 

“뭐를요?”

“나 운동한 거.”

“알겠어요.”

나는 A씨 상태변화의 대부분을 어머니께 따로 전달한다. 특별히 힘들거나 특별히 행동이 다르거나. 그게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는데 중요하기도 하고 내 책임을 줄이는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날의 일은 잘못도 아니었고, 오히려 칭찬받을 일이었다. 꼭 전달할 이유도,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내 마음으로는 꼭 알려드리고 싶었지만 말이다. 활동지원사인 나는 누구의 편인가. A씨와 보호자의 바람이 상충한다면 나는 A씨의 의사를 우선하는 게 먼저였다. 

왜 비밀로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A씨가 원한다면야 그렇게 해야지.

생각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비밀을 하나정도 갖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A씨는 늘 돌봄을 제공하는 누군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게 답답했을 수도 있다. 혼자 즉흥적으로 무언가 즐기는 시간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날도 A씨 옆에는 내가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비밀을 지켰고 A씨는 그 뒤로 한 번 정도 더 혼자의 운동 시간을 가졌다. 날씨가 좋은 날에만 일어나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나는 풀숲 속에서 새들이 노는 장면을 발견한 것 같은 관찰의 즐거움을 누렸다. 그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을 어머니도 모르고, 다들 지나쳐갔을테지만 나만은 아는 A씨만의 독특하고 비밀스러운 순간을 보았다는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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