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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은 Nov 10. 2024

폭염


너무 덥다. 더워서 미칠 것 같다. 연일 폭염 경보가 나왔고 뉴스에서는 아스팔트가 녹은 영상을 보여주었다. 엘니뇨, 해수면 상승, 지구 열대화, 무더위의 원인을 찾는 온갖 단어들이 등장하던 여름에도 나는 일을 했다. 오전 일찍 출근해 전철로 이동하는 A씨의 일은 할 만 했다. 전철에 냉방이 나오고 시간대도 한낮이 아니었다. 반면 오전 11시부터 2시까지 하는 B씨의 활동지원 일은 나를 땀에 절게 했다. 반지하인 B씨의 집은 통풍이 잘 되지 않았고 에어컨은 없었다. 담배연기 때문에 창문도 늘 닫아두었다. 게다가 B씨의 방에는 선풍기도 없었다! 선풍기는 B씨 남동생의 방, B씨 아드님 방에 하나씩 있었는데 그 방은 내가 들어갈 일이 없었다. 나는 여름 내내 높은 습도와 30도 이상의 온도를 유지하는 집 안에서 밥을 차리고 B씨의 방을 정리하고 빨래를 갰다. 한 시간쯤 지나면 땀이 송골송골 맺히다 떨어졌다. 

 이렇게 벗어날 수 없는 더위를 느낀 게 얼마만인가. 나는 헉헉 거리면서 계속 이 생각을 했다. 지구는 매년 더 뜨거워진다는데, 사실 그만큼 냉방 기술도 강력해져서 한낮을 냉방이 잘 되는 실내에서 보내면 이 정도의 무더위를 느낄 일은 많지 않았다. 대형 마트, 도서관, 카페, 학교, 회사… 돈만 있다면 피서를 할 만한 공간은 무수히 많다. 

문제는 B씨는 돈이 없다. 정말로 없다.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집에만 있으니 용돈 명목의 돈도 전혀 없는 상태다. 가장 오랜 칩거 생활로 발가락도 많이 망가져 있는터라 인근 주민센터를 갈 용기를 내는 것도 쉽지 않다. 이 일대에서 가장 지대가 높고 외진 산 중턱에 있어 임대료도 싼 골목에 있는 B씨의 집에서 주민센터까지 가려면 가파른 오르막을 15분 간 올라 집으로 돌아올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 역시 B씨의 바로 옆 빌라에 살고 있지만(내 집이 B씨의 집보다 좀 더 높은 곳에 있다), 이 주변은 모든 게 내리막이고 올라올 땐 오르막이다. 단순히 산책이나 장보러 나가는 것도 몸이 아파 걷기 어려울 때는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 B씨의 집이 평지에 있었다면 나도 그를 새로운 곳에 데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B씨가 이렇게 오래 칩거 생활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이 주변의 임대료가 싼 것이다. 그래서 나도 B씨도 이 높은 곳에 사는 것이고, 덜 불편한 곳으로 갈 여력은 되지 않으니, 우리 둘은 폭염 속에 홑이불 위에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돈도 건강도 없는 사람들에게 허락된 건 겨우 이 정도 푹푹 찌는 공간인가. 부유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더 편한 지대에 살 수 있다는 불공평함에 화가 나는 것도 잠시, 덥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작년에는 여름에 어떻게 났어요? 재작년은요?”

나는 B씨의 오래된 부채를 들고 한 손은 내게, 다른 손은 B씨에게 부쳐주며 물었다. 당연히 B씨는 누워서 눈을 꿈뻑거릴 뿐 대답은 하지 않는다. B씨는 잠을 자면서 여름을 나기로 결심한 듯이 한낮에는 정말 많은 시간을 자면서 보냈다. 일어났어도 그냥 다시 잠들거나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다. 나는 깨워도 더워하는 것 말고는 해줄 게 없어서 그냥 잠든 B씨에게 부채질만 했다. B씨가 꿈 속에서 굳건히 여름을 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피부에 끈적하게 땀이 고이고 살이 접히는 부분에는 빨간 땀띠도 생겼다. 이 범람하는 냉방 기술의 시대에 땀띠라니. B씨의 집에 있다보면 내가 사는 삶은 다른 세계처럼 느껴진다. 대형 마트, 카페, 자동차, 쉼 없이 돌아가는 에어컨, 이 세계에서 더위는 비처럼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할 때에 느껴지는 잠깐의 불쾌함이다. 이 세계에서 나는 올해가 우리가 맞는 가장 시원한 여름일 것이라는 뉴스 앵커의 말을 들으며 막연한 불안과 죄책감을 느낀다. 반면 B씨의 집에 가 찜통 더위 속에 있을 때 그런 뉴스를 보면 짜증과 화가 난다. 이 동네 사람들이 에어컨을 계속 틀어서 집 앞 도로의 온도가 높아지고 있는 점에 대해(사실 이 빌라는 대부분 선풍기로 여름을 난다), 고지대에 너무 많은 집을 지어서 B씨가 더위를 피해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만든 세상에 대해, 아직 사람들은 충분히 덥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정말로 모두가 더위를 주어진 그대로 감내해야 한다면, 세상이 아직도 이렇게 뜨거울 리 없다. 모두 시원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모든 냉방 시설을 없애고 더위 속에 사는 게 낫다. 기술의 폐해인 에어컨을 파괴하자…이런 논리적 귀결이 한여름 B씨의 집에서 일하던 내 사고 과정이었다. 

그나마 새로 도착한 에어서큘레이터가 B씨 남동생 방으로 쏙 들어가는 걸 보면서(심지어 그는 내게 새로 산 걸 자랑하기까지 했다!) 나는 사례관리사에게 더워서 더는 못 참겠다고 말했다. 땀띠가 나도록 사람을 방치하는 건 인권적인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후원 기관에서 선풍기 하나를 보내준다고 했어요. 올 때까지 조금만 참아주세요.”

사례관리사의 말에 나는 선풍기가 오기까지 남은 한 달을 어떻게 버틸까 고민했다. 나도 여러 방법을 써 보았다. 목에 거는 선풍기를 사서 출근하거나 손풍기를 들고 갔는데, 일을 하다보면 나보다는 B씨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아 늘 그냥 주고 왔다. B씨는 내가 있을 때만 손풍기를 쓰고 내가 가고 나면 사용법을 잊은 듯 옆에 밀어 놓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기도 하고, 이런 저런 방법을 고심하던 나는 그냥 후원받은 선풍기가 올 때까지 B씨와 부채로 버텼다. 음료수도 목에 거는 선풍기도 모두 일시적일 뿐이고, B씨 가족들에게 더위는 매년 익숙해진 것 중 하나인데 나 혼자 시원하고자 애쓰는 게 창피했기 때문이다.

그냥 더워하자. 그리고 이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자. 내가 마침내 이런 인내의 심정에 다다랐을 때, B씨가 무덤덤하게 이 더위 속에 잠들어 있는 것도 다 이런 심정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하루하루는 지나가기 마련이니 마냥 버티기. 내가 매번 알려주는 손풍기 작동법을 기억하지 않는 것도 이 정도의 시원함은 잠깐일 뿐 상황을 나아지게 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 아닐까? 그냥 더위를 만끽하자 생각하면 마음은 꽤 편해진다(신체는 괴롭지만).

발달장애가 있는 B씨의 의중을 상상할 때 가장 문제점은, B씨가 어떤 걸 원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원하는 걸 모르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B씨는 더운 게 괜찮았던 게 아니라, 시원해질 방법을 찾을 수 없거나 몰랐기 때문에 계속 더위에 익숙해진 것일 수 있다. 선풍기 작동법에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내가 가고 나면 선풍기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서 그대로 두었는지도 모른다. B씨는 삶을 개선하지 않아도 괜찮아서 한낮이면 잠을 잔 게 아니라, 한낮에 다른 식으로 더위를 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 잠만 잔 것일 수 있다. 내가 오면 어찌됐건 살짝 더 시원했기 때문에 B씨가 나를 더 반겼을 수도 있다. B씨의 방 안에서 폭염의 날씨는 내게 거의 통증처럼 느껴졌다. B씨는 이미 익숙했기에 스스로 고통을 느끼지 못했더라도, 늘 그 괴로움 속에 있었던 게 아닐까? 정말 매년 더 더워진다면, B씨는 어떻게 살지? 내가 세상을 더 시원하게 만들수도 없고, B씨를 건강하게 만들수도, B씨에게 에어컨을 사라며 거액의 돈을 줄 수도 없는데. 나는 B씨에게 부채질을 해주거나 선풍기를 강풍으로 틀 수 있었다. 밥을 먹이고 시원한 물을 떠 주고 B씨의 남동생을 붙잡아서 B씨가 간식 살 돈을 조금 얻어올 수 있었다. 그게 나 하나가 B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집에 가면 에어컨을 틀었다. 샤워를 하면서 땀에 절은 옷을 빨고, 에어컨이 잘 틀어진 침대에 누워 쉬었다. 남은 시간에는 전철을 타고 이곳 저곳의 실내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사고 음식을 사고 자동차를 타고 도서관도 갔다. B씨의 집이 내게 남긴 흔적이라면 카페 에어컨의 차가움이 낯설게 느껴졌단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시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런 시원함은 자연스럽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다. 그러면 B씨의 취약한 상황을 버리고 카페의 매출을 올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비겁한 동조를 하는 것일까. 장애과 빈곤과 연결되어 있고, 빈곤은 기후 위기에 취약하다. B씨의 삶은 이 도식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이들 삶의 도식을 계속 생각하는 게 취약함을 강조하는 것 말고 어떤 식의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B씨와의 관계에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보다도, 내가 B씨에게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음을 먼저 깨닫는 게 편안함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나는 원래 적당히 비겁한 사람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남을 도와줄 수 있다. 중요한 건 내가 시원하건 덥건, 관계가 쌓이고 나면 늘 한 켠으로 상대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골목을 올라갈 때 B씨의 반지하 방 불이 켜진 것을 보며 오늘 잠은 잘 잤는지, 밥은 먹었는지, 삶은 살 만한지, 무엇이 필요한지...그런 걸 궁금해 하게 된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바로 옆 건물인 B씨의 집은 괜찮을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 해 여름에는 폭염 이후로 다시 미칠 듯한 폭우가 쏟아졌다. 옥상 하수구에서부터 천둥 치는 소리가 나고, SNS에는 물에 잠긴 버스정류장과 재래시장 소식이 계속 등장했다. 내 집은 5층이라 물이 유리창 넘어 조금 들어올 뿐 큰 문제는 없었다. B씨 집은 괜찮은가 싶어 남동생에게 안부 문자를 하니 답장이 왔다. 

-현관 물 넘쳐서 퍼냈어요. 장판 냉장고 젖었는데 지금은 그쳐서 물 안 들어와요.

-괜찮아요? 현관문도 잘 열려요?

-네.

밤새 쏟아지던 비도 점점 그쳐가고 있었다. 보내준 장판 사진과 현관을 보니 급한 상황은 아닌 듯 했다. 나는 피해간 폭우 피해를 B씨의 집은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에 다시 씁쓸해졌지만, 답장을 보냈다.

-그럼 내일 갈게요. 

어느새 밤 사이 서로를 걱정하는 사이가 되었구나. 걱정은 보통 나만 하지만. 폭우 뉴스 속보와 물줄기가 세차게 흐르는 골목길. 이 소란 속에서 잠들어 있을 B씨에 대해 생각하면, 세상은 더 위험하고 취약한 곳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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