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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은 Apr 12. 2023

먹어줘, 제발


할머니들은 왜 잘 먹는 게 좋다고 그럴까. 오랜 의문이었다. 난 먹는 걸 크게 가리지 않는 편이라 별 것도 아닌 걸로 칭찬을 듣는 게 이상했다.


돌봄교실에서 일하다보니 깨달은 건, 먹는 일은 모르겠지만 먹이는 일은 쉽지 않다.


한 학기 끝나고 일주일 정도 쉬었다 오면 매번 교육부 정책도 돌봄 교실 운영 방식도 바뀌어 있다. 이번 학기부터는 돌봄교실 급식을 다시 시작했다. 학급은 여전히 대부분 온라인 수업이지만 급식실과 돌봄교실은 쉬지 않는다. 


급식 시간에는 정신이 두 배로 없다. 배식과 아이들 관리까지 같이 해야하기 때문이다. 일단 화장실에 가서 손 씻을 때 누가 장난치지 않는지 확인해야 하고, 뜨거운 배식판이 있는 복도를아이들이 뛰어다니지 않게 우렁찬 소리도 몇 번 질러야 한다. 


급식차를 정리하고 배식하는 건 돌봄교실 선생님들의 몫이기 때문에 국을 뜨면서 교실 안도 확인한다. 

잠깐만 배식에 집중하면 줄 끝에서 승혁이가 동생 승준이를 거꾸로 뒤집어 흔들고 있다. 세상에나! 승혁이와 승준이를 떨어트려놓고 다시 급식차로 가면 교실 안에서 민혁이와 태훈이가 괴성을 지르는 게임을 하고 있다. 배식을 하려면 선생님이 세 명은 있어야 한다. 김 선생님과 최 선생님과 나. 아이들을 관리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점심 시간에 돌봄 교실이 유난히 호통 소리로 넘치는 건 그 때문이다. 


배식은 늦잠 잔 자식한테 밥을 먹이려 애쓰는 엄마의 아침 풍경이 동시에 열 개 정도 상영되는 것 같다. 아이들은 이 반찬 저 반찬 다 빼달라하고 선생님들은 어떻게든 먹이려 한다. 

“반만 먹어. 반만. 이거 되게 맛있어.”

어르고 달래거나

“안돼. 안돼. 다 먹어. 너 다 먹을 때까지 노는 시간 없어.”

권력을 이용한 협박도 한다.


처음에 나는 빼달라는 반찬은 다 빼주었다. 알고보니 돌봄 교실은 ‘아이들이 싫어도 먹게 하라’는 게 기본 방침이었다. 공문이 내려온 건 아니고 선생님들 사이의 규칙이었다.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될 텐데 왜 굳이 먹으라고 할까. 다들 실랑이하는 데 바빠 그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는데 내가 짐작한 바가 몇 개 있다.


첫째로, 애들이 먹기 싫다고 내버려두면 정말 적게 먹는다. 잘 먹는 아이들은 많지 않다. 신나게 놀아놓고 왜 다들 그렇게 밥은 먹기 싫어하는지. 제 입맛대로 먹이면 아이들은 마르고 음식물쓰레기는 남아돌 것이다.

둘째로, 아이들에게 맡기면 식단의 영양이 형편없어진다. 아이들이 원하는 음식은 치킨과 튀김이지 밥과 야채가 아니다. 아이가 좋아한다고 라면만 먹일 수 없듯이 먹기 싫은 것도 억지로 먹여야 한다. 


그래서 배식 시간은 반찬을 가지고 정신없이 실랑이하다, 배식이 끝나면 ‘그만 먹고 싶다’와 ‘더 먹어야 한다’로 실랑이 한다. 가장 맛있는 반찬만 먹고 나머지는 그대로 남은 급식을 버렸다간 내가 김 선생님과 최 선생님한테 한 소리 듣는다.

김 선생님은 보육교사의 전문성을 발휘해 아이들을 억지로 먹여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편식이 심한 애들이 계속 음식을 가리다보면 나중에 커서도 새로운 경험 같은 걸 하기 싫어하고, 닫혀 있어.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억지로라도 먹어야 해. 지금 잡아야 해. 쌤.” 


난 단호한 김 선생님과 달리 상당히 무게감 없는 어르고 달래기 기법을 쓴다. 

“아냐. 지현이 더 먹을 수 있어. 지현이 너는 배부르지 않아. 자자, 더 할 수 있어!”

타협도 해줘야 한다. 

“밥 세 숟갈하고 반찬 두 개 더 먹으면 버리게 해 줄게.”


싫은 걸 억지로 먹는 사람도 고역이겠지만,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억지로 시키는 내 입장도 찝찝하긴 마찬가지다. 지현이는 밥을 먹는 대신 숟가락으로 밥과 반찬을 마구 난도질하고 있다. 급식 시간이 끝날 때까지 저렇게 한 숟갈도 먹지 않고 불쌍한 음식을 곤죽으로 만들 며 나를 쳐다볼 것이다. 


단순한 알바인 줄 알고 시작했다 어영부영 떠넘기기 식으로 스무 명의 아홉 살을 책임지게 된 나로서는, 가끔 그냥 아이들한테 너네 하고 싶은대로 다 하라고 하고 싶다. 난 누워 있을테니 원하는 대로 화장실 가서 물장난도 치고 동생 거꾸로 뒤집기도 하고 밥도 한 숟갈만 먹고. 그건 ‘나는 더 이상 너희를 돌보지 않을거야!’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옛날에 아이를 잘 돌본다는 건 아이를 웃겨서 나를 좋아하게 만든다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아니다. 돌보는 일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걸 먼저 파악하고 관찰하고, 상황에 맞춰 타협과 통제를 적절하게 조율하는 일이다. 손에 말 고삐 스무 개가 들려있고 다 제멋대로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다. 아이들과의 밀고 당기기의 싸움을 8시간 내내 하다보면 기운이 쪽 빠진다. 먹이는 실랑이를 계속 하다보며 느낀 건 아이들은 스스로를 챙길 줄 모르는구나. 그래서 이 아이들이 다치거나 배고프거나 울지 않도록 돌볼 사람이 필요한 거구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난 처음 알았다. 너는 모르겠지만, 너는 작고 소중하니까 나는 너를 먹여야만 해. 물론 이런 사랑스러운 마음만 있는 건 아니고, 책임과 자존심과 고집이 걸린 실랑이다. 매일 급식 시간이 지날 때마다 나는 이제 내가 과자로 마음대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을 지나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들, 돌보는 사람들에 더 가까워졌다는 걸 느끼고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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