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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범 May 17. 2024

메디아 루나 - 살리다 11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등장에 잠깐 동안 얼어붙어 표정을 풀지 못했다. 사람들이 슬슬 올 시간이기는 했으나 그녀가 처음으로 올 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밝은 미소로 밀러와 인사했다. 밀러는 평소처럼 그녀에게 포옹으로 인사에 답했다. 밀러의 포옹에 엘리아나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포옹을 하는 등 너머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에게 눈으로 인사를 하자 그녀도 눈으로 인사했다. 포옹이 끝나자 밀러는 악기를 치우기 위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수업 준비를 해야 하니 두 분이서 이야기를 나누라고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밀러는 볼 일을 보러 떠났다. 그녀와 나만이 테이블에 덩그러니 남아 마주 앉았다.

 

"어떻게 지냈어요? 별일 없었나요?"

어색함을 깨기 위해 그녀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녀가 웃으며 답했다


"별일은 없었어요. 그런데, 지난주에 배운 동작 기억나세요? 집에 가서 연습해 보려고 했는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거예요. 데이빗 님은 기억하시죠?"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녀의 수줍은 미소를 보고 긴장했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사람은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느끼며 그녀에게 말했다.


"대강의 기억하고 있어요. 집에 가면 혼자서 한 번 스탭을 따라 해 보거든요. 같이 했을 때는 어쩔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억력이 정말 좋으신가 봐요. 저는 집에 가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말끔히 지워져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올 때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리드하는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으면 된 거죠.로(탱고를 추는 남자)들이 잘 리드해주지 않을까요?"


"에이, 그래도 라(탱고를 추는 여자)들이 잘 따라와 줘야 춤이 되잖아요. 혼자서 잘할 수 있는 춤은 아니니까, 저도 열심히 해야죠. 탱고는 참 어려운 거 같아요."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쉽게 배울 춤은 아닌 거 같아요. 특히 남자에게는 너무 진입장벽이 높은 거 같아요. 어렵습니다, 잘하고 싶은데."


"저도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되네요. 그래도 저희는 같은 기수니까 같이 열심히 해봐요. 아, 그런데 데이빗 님은 어쩌다 탱고를 배우게 되셨어요?"


"아, 탱고요? 어쩌다 보니,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낭만을 느꼈달까, 운명을 느꼈달까, 뭔가 저를 어루만져줄 것 같았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너무 많은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났다. 정리하지 못한 단어들과 감정들을 나열하지 못한 채 얼버무리며 대답하고 말았다. 그녀는 희한한 사람을 보는 표정으로 내게 다시 질문했다.


"뭔가 되게 복잡하고 심오하네요. 어떤 운명을 느끼셨길래, 이렇게 숨기세요."

그녀가 작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아, 숨기는 건 아니고,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저도 정리가 잘 안돼서, 죄송합니다. 그럼 엘리아나 님은 왜 탱고를 배우세요?"


"어, 제가 먼저 물어봤는데 말 돌리시는 건가요?"

처음 보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평소에 인사도 잘 받아주지 않았던 그녀라 그녀의 이런 반응이 어딘가 어색하고 신기했다.


"엘리아나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리가 될 것 같아서요. 혹시 실례가 아니면 말해주실 수 있나요?"


"에이 뭐 실례까지 가요. 운명이라면 저도 운명인데 할머니가 탱고를 추셨어요.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너는 꼭 탱고를 배워라,라고 하시는 바람에 이렇게 탱고를 배우고 있네요."


"할머님께서요? 그거 정말 신기하네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떻게 탱고를 아시고 배우셨던 건지, 왜 엄마가 아니라 저보고 그걸 배우라고 한 건지 궁금하긴 해요. 그래도 할머니 덕분에 탱고를 시작했고, 재밌게 하고 있으니까 만족해요."

그녀의 사연을 들으며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떠오르는 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진짜 '나'를 찾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러기 위해선 내가 없어야 하는데, 그 답이 탱고에 있을 거 같아서 탱고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우연히 길을 가다가 탱고 포스터에 적혀 있는 문구를 봤었는데, 거기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더라고요. '네 개의 다리, 하나의 심장', 이 문구를 보고 탱고를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 이야기 들어본 거 같아요! 꼬라손(Corazón)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할머니께서도 그걸 느껴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셨었어요. 그런데 아직 그게 뭔지 잘 모르기도 하고, 춤을 추면서 정말 상대랑 하나 되는 느낌을 느낄 수 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적어도 일단 음악을 완전히 느끼고 원하는 춤을 출 수 있게 돼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때는 내가 없어지겠죠."

이야기를 하다 떠오르는 기억에 나도 모르게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순간 정신을 차리고 대화가 끊기지 않게 말을 이어가려 했다. 그때 밀러가 정리를 마쳤는지 우리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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