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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아 루나 - 오쵸 6

Ocho 6

by 양희범 Mar 11. 2025

회사에 도착하니, 대부분의 직원들이 퇴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나도 서둘러 정리를 끝내고 탱고 연습을 하러 가야 했다. 빠르게 자리로 가서 오늘 인터뷰한 내용을 컴퓨터에 옮겼다. 로딩 화면이 떴고, 작업이 완료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장이 내 자리로 다가왔다. 벌써 퇴근한 줄 알았는데 아직 퇴근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을 빨리 마무리하고 갈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가 오는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신경 쓰지 않고 화면만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내게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거 오늘 인터뷰 자료지? 고생 많았네. 근데 지금 손님이 와 있어. 잠깐 사장실로 가자."

그의 말에 아무 대꾸 없이 자료가 다 옮겨지기만을 기다렸다. 작업이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사장의 표정을 살폈다. 짐작할 수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그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자윤 교무님이 오셨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같이 들어가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한 번쯤 연락이 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 여겼으니까. 오늘은 더 이상 그녀를 보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또다시 마주해야 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걸 정리하려 했다. 그때도 그랬다. 느닷없이 나를 바보로 만들었던 그 순간처럼. 어쩌면 그녀는 ‘염치’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걸 알았다면, 이렇게 찾아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한숨을 삼키며 재촉하는 사장을 따라 사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자윤이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왔군요. 서로 할 이야기가 남았다고 생각해서 왔어요. 앉아요."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더 할 말이 있을까요, 우리가? 아니, 할 말이 있는 건 이쪽이어야 하지 않나? ‘할 말이 있다’니, 놀라운데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습관처럼 비꼬며 말이 나갔다. 말하면서도 이렇게 날카롭게 반응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터져 나오는 감정을 막을 수 없었다. 지훈, 아니 사장도 당황한 눈치였다. 이 자리를 마련하면 내가 이렇게 나올 걸 몰랐을까? 내 감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을 진행한 그의 무책임함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아진아, 그래도 한 번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잖아. 너무 흥분하지 말고 잘 이야기해 봤으면 좋겠다. 아예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이제 같이 일도 해야 하는데 잘 마무리하는 게 좋지 않겠어? 다른 종교 분들도 계신데 네 감정 하나 때문에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지 않겠어?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그것도 예의가 아니야."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그를 보면서 위선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이 깊은 사람이 내 감정 하나를 배려하지 못하다니, 배려를 가장한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회사의 사장이었기에 별말을 할 수 없었다.


"알았어요. 알겠으니까. 형은 그만 자리를 피해 주세요. 저도 앞뒤 구분은 할 줄 알아요. 기왕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주셨으니 이야기 잘 나누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주."

입술을 깨물며 짧게 대답했다. 비꼬는 말투를 숨기지 않았다. 지훈은 알았다고 답하더니 단지 사장실을 나갈 뿐 퇴근할 생각 없어 보였다. 아마도 내가 사고를 칠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를 내보내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해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무것도 없는 빈 잔을 들고 입에 가져대는 행동을 반복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찾아왔을까? 궁금하네, 무슨 말을 할지."

그녀는 빈 잔을 내려놓고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대답했다.


"사실,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어요. 보통은 만날 일이 없으니까.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않을 줄 알았고요. 그런데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종교와 관련된 일을 하고 계시네요. 만약 제가 여기서 일하는 걸 알았다면, 이 일을 맡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일이니 저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서로 과거는 내려두고 해야 할 일에 집중했으면 해요. 웬만하면 사적인 감정은 피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적어도 사과할 줄 알았다. 미안해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녀는 나를 머저리 취급하고 있었다. 감정에 휩싸여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모자란 사람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혹시나 했던 최소한의 사과조차 없었다. 그녀는 내게 단 한 마디의 미안함도 없이 모든 걸 정리해 버렸다.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적인 감정은 그쪽에서 가지고 있는 거 같은데, 불편한가 봐?" 

입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불편하겠지, 누구 때문에 내가 이 꼴이 났는데. 적어도 그런 식이었으면 안 됐어. 먼저 이야기했어야지. 내 손을 그렇게 놓지 말았어야지. 그래놓고 지금 내게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그날 일이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한다는 게 놀랍네. 순진한 거야 멍청한 거야?"


자윤의 얼굴에 처음으로 살짝 감정이 스쳤다. 그러나 그녀는 곧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성 낮추시고,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지난 일이고, 한 때의 방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옳지 않은 일이란 걸 서로 알았잖아요. 끝까지 갈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요. 고집을 부리다가 자신의 길을 망친 건 아진 교우 자신이에요. 그걸 제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도 아직 공부가 부족한 것 같네요. 오욕 번뇌에 이끌리지 마시고, 자신을 돌아보시고 뭐가 정말 정도인지, 뭐가 마음공부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게 우리의 마음공부입니다."


그녀의 말에 주먹을 꽉 쥐었다.

"아주, 잘나셔서 모든 걸 다 정리하셨나 보네. 난 공부가 모자라서 그렇게 못하겠는데. 넌 적어도 내게 사과했어야 했어. 내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했어. 우리가 정말 한 때라도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다면! 정말로 나를 사랑했었다면 그래선 안 됐어! 알아? 그날 감찰원, 교정원 교무님들 앞에서 나 혼자 사랑을 말했을 때, 그때 이미 내 인생은 끝이었어. 꿈꿨던 모든 것들이 무너졌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회는 있었어요. 아니었다고, 죄송하다고 빌었으면 선처해 주셨을 겁니다. 그런데도 아진 교우가 고집을 부렸잖아요. 그리고 사랑이란 말 함부로 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많은 고민 끝에 정말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결정한 것이니까요. 저는 진리를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세속적인 관념에 절 끌어들이지 마세요. 저는 그날 이후로 다 정리하고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먼저 쪼르르 가서 자수를 할 거였으면 먼저 내게 이야기하고 차라리 정리를 시켰어야지! 그게 최소한의 예의 아니야? 너 혼자 정리하고 너 혼자 지도 교무님께 말씀드려서 해결하고 나면 나는? 나는 도대체 뭐가 되는 건데? 그거에 대한 미안함이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너 정말 뻔뻔하구나?"


"그러니까 그걸 그렇게 상대에게 투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참회하셔야 해요. 에고와 자신을 분리하셔야죠. 그건 진정한 '나'가 아니에요. 진정한 '나'를 찾으신다면 그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참회하시고, 마음공부하세요. 그게 서로를 위한 일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차갑고 논리적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모든 말이 벽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미안한 기색조차 없었다. 모든 걸 나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었으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답답하네, 마음공부를 하고 말고는 내가 알아서 해! 그전에 먼저 사과를 하라고 사과를!"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문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황급히 나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진아, 진정해! 이렇게 화내면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하지만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오히려 더 화가 치밀었다. 그런 그의 행동은 나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형은 빠져. 이건 나랑 이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야!"

지훈을 밀쳐내고 말했다.


"이런 반응, 예상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스스로만 힘들어질 뿐입니다. 이제는 받아들이세요.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자윤은 여전히 침착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내 분노조차 예상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지나간 일? 네가 그렇게 결정했겠지. 하지만 난 아니야. 난 여전히 그날을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솟아. 그런데도 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앉아 있네. 대단하다, 정말."

더 이상 이 공간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걸어갔다. 

"사과할 생각이 없으면 다시 찾아오지 마.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난 그렇게 바보가 아니야. 나를 무시하지 마. 찾아와서 사람 열불 나게 하고 있어 짜증 나게."

손잡이를 열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장실을 나왔다. 지훈이 뒤에서 뭐라고 불렀지만,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회사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밀려들었다. 손이 떨릴 정도로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엘리아나와의 약속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그녀와 미리 만나서 연습을 하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어디쯤 오고 있냐, 오늘은 오지 못하냐는 등의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그녀에게 급하게 일이 생겨서 마무리하고 이제 출발했다고 답장을 했다. 머리가 뜨거웠다. 빨리 엘리아나를 만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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