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리에서 다시 만난 취향의 맛

우도와 종달리 기념품 쇼핑리스트

by 김유연

여행에서 쇼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우도-종달 일정에서 고달픈 일도 많았지만 그만큼 귀여운 만남도 많았다. 우도와 종달 모두 각자의 특산품을 앞세운 개성 있는 기념품을 잔뜩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살 수 있다는 말은, 지갑을 열게 하는 마법의 주문이다.


우도에서의 쇼핑리스트 1위는 단연 땅콩이다. 우도 땅콩은 알이 작고 맛이 진하고 고소해 인기가 많다. 그러나 엄청난 수요에 비해 공급이 한정되어 있어 대부분의 유통량이 섬 안에서 소비된다. 특히 수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햇땅콩과, 그 햇땅콩을 당일 아침에 갈아 만든 땅콩버터는 제주도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희귀 상품이다.


한참 다이어트를 위해 땅콩버터에 입문한 참이었어서 우도 햇땅콩 100% 무첨가 땅콩버터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고수동 해수욕장의 기념품 샵에서 땅콩버터 한 스푼을 맛볼 수 있었다. 질감이 거칠면서도 따듯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매일 몇 번이고 직접 갈아서 만든다고 했다.


도저히 이 매력적인 견과류 잼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가족에게 선물할 작은 소포장 땅콩 몇 봉지와 땅콩버터 한 병을 샀다. 어깨에 맨 배낭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제주도의 특별함이 작은 조각들로 바뀌어 가방 안에 쌓여간다. 저 멀리 자취방에서도 그 맛을 느끼고 기억할 수 있도록.


IMG_0079.jpeg 우도에서는 우도산 볶은 땅콩, 땅콩버터, 땅콩강정 등 다양한 땅콩 제품을 살 수 있다.
IMG_0092.jpeg 가게마다 미묘하게 포장 방식이나 가격, 용량이 다르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특산물 쇼핑은 언제나 재밌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게다가 소유보다는 경험 소비에 가깝다. 이곳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해 보았다는 ‘경험의 감각’을 산다. 해외여행을 가서 한식만 먹다 오면 만족감이 떨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는 싱싱한 고등어회, 뜨끈한 몸국, 고기국수와 흑돼지 등 수많은 ‘제주도 음식’들이 관광객을 유혹한다. 여행자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유혹에 순응한다.


마찬가지로, 종달리의 작은 소품샵에서 이름도 생소한 호박잼을 만났을 때에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호박잼은 땅콩버터보다도 더 귀하다. 어디서도 호박으로 잼을 만든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밖에서 봐도 아기자기한 인형과 소품이 가득한 가게에 들어서니 사장님 부부가 따듯하게 맞이해 주셨다. 아직 뭘 사지도 않았는데 직접 담근 한라봉 차와 크래커를 내어주신다.


잼을 궁금해하니 당근잼, 호박잼, 한라봉잼을 모두 크래커와 함께 맛보게 해 주셨다. 달콤한 환대에 속이 따듯해진다. 호박잼이라는 특수성만으로도 이미 구매욕구가 잔뜩 올라와 있었는데, 사장님의 배려가 마음과 지갑 모두를 활짝 열어버렸다.


한편으로는 완전히 딴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나라면 이렇게 맛보기를 줄 생각은 전혀 못 했을 텐데. 이렇게 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걸까. 사람과 얽히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을 바꿔야 하는 걸까.’


나의 성격에 대입해 생각한다는 것은, 사장님의 응대력에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뜻이다. 먼저 기꺼이 내어주는 사장님의 호의는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구매로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야말로 라포의 달인이다.


한라봉 차를 다 마시니 이번엔 달지 않은 귤피차를 한 잔 더 내어주셨다. 새콤달콤한 한라봉 차와 달리 담백하고 편안한 맛이었다.


결과적으로 호박잼을 한 병 샀다. 시중 잼에 비하면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지만 100% 수제에 소량 생산이니 비싼 것이 당연하다. 뭐든지 제 값을 주고 사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 단지 내 지갑사정이 그리 자유롭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예산이 무제한이었다면 귤피차도 한라봉차도 당근 잼도 샀을 것이다.


이렇게 고양이가 생선가게 못 지나치듯 제주도 한정 특산품 구매를 이어갔다. 너무 큰돈을 쓰지 않게 조심했지만 지나치게 아끼려고 하지도 않았다.


IMG_0372.jpeg 들어가자마자 내어주신 한라봉 차와 잼, 그리고 한라봉
IMG_0366.jpeg 정겨운 감성이 넘치는 종달리 소품샵 <잼 있는 집>




그러고 보면 20대 초반의 나는 쓸모없고 예쁜 소품을 사는 걸 정말 좋아했다. 홍대의 작은 빈티지샵에서 한 벌밖에 없는, 낡은 와펜이 달린 큼직한 후드티를 사 입곤 했다. 테이블에 올려놓고 쳐다보는 기능밖에 없는 중세 기사 피규어 따위를 몇 만 원을 주고 사고는 했다. 그때의 나는 경제관념은 부족했지만, 적어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나도 나를 모르겠어.' 같은 말은 내 삶에는 없는 문장이었다.


언젠가부터 경제적인 위기감을 자각하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절약하고 아끼는 생활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물질주의를 받아들이고, 명확한 성공의 기준을 정한 후로는 점점 쓸데없는 소비를 하지 않게 됐다.


이전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술이 주렁주렁한 에스닉 귀걸이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돈 쓰는 건 질색이었고 8천 원짜리 링귀걸이 한 쌍이면 대충 어떤 복장에도 두루 걸칠 수 있었다. 소비하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지고 또 자부심을 느꼈다. 분명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었다.


그렇게 20대 후반의 나는 꼭 필요한 곳에만 알뜰하게 돈을 쓰는 건실한 청년이 되었다. 전공상 대학생활을 오래 했기에 제대로 돈을 버는 사회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모으고 절약하는 습관만큼은 미리 들여놓자고 생각했다. 분명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소비가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샌가 취향도 사라져 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게 됐다. 나는 원래 뭘 좋아했더라. 어떤 일에 흥분하고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었던가. 무엇이 내 취향이고 가치관이었지? 이전처럼 쉽게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정말 진심으로,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물론 소비 습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위험해지기 쉽다. 소비 외에도 나를 만드는 요소는 수없이 많다. 절약을 이어가면서도 나를 찾는 길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제주도의 편집샵에서, ‘맞아, 나 이런 거 엄청 좋아했었는데.’라고 생각하며, 아주 오랜만에 예쁘기만 한 돌에 돈을 쓰면서. 왜 오래전에 헤어졌던 나 자신을 만난 것 같았을까.


호박잼의 독특한 달콤함과 직접 만든 구수한 귤피차. 예쁜 피라미드 모양의 소포장 우도 땅콩. 그런 것들이 다시 마음을 움직였다. 성장하고 발전하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삶 속에서 구석진 곳으로 몰아버렸던 나의 취향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취향은 호박 잼 맛이었다.


IMG_0371.jpeg 종달리에서 만난 수제 호박잼.

<개인적인 우도 쇼핑리스트 & Tip - 하고수동 해수욕장 쪽에 기념품샵, 소품샵들이 모여 있다.>

100% 우도산 햇땅콩(추천)

100% 우도산 땅콩버터(추천)

땅콩 테마 키링, 지갑 등 소품들

우도 땅콩 샌드, 땅콩 아이스크림


<개인적인 종달리 쇼핑리스트 & Tip - 뜨개질, 소품, 향기 등 컨셉이 확실한 소품샵들이 흩어져 있다.>

당근잼, 호박잼, 한라봉잼(추천)

인센스 스틱, 향기 제품들

뜨개질 인형, 키링, 인테리어 소품

독립서점 책 구경


IMG_0288.jpeg 종달리의 독립서점 <책약방>
IMG_0321.jpeg 종달리의 향기 전문 소품샵 <달리센트>
IMG_0350.jpeg 종달리의 독립서점 <소심한 책방>

제주도 여행기는 계속됩니다. 구독해 두시면 이어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월수금 연재)



월, 수, 금 연재
이전 12화우도의 빛깔, 우도 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