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사랑으로 취급되나요?> 55

흐릿한 2년간의 기억과 끝나가는 인연

by 에스

55



"이제 더 이상 기댈 곳도 기대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니까 뭔가 탁, 끊기는 기분이야.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여태껏 무언가 한 가지를 보며 살아왔어. 앞으로도 그 한 가지만을 위해서 살 작정이었어. 근데 그 한 가지가 사라져 버린 거야. 당장 내일을, 이 순간을 무얼 위해 살아가야 하지?라는 생각이 매 초마다 들어. 그냥 이유가 없어져 버린 거야. 당장 12월에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 이유도, 밤새 공모전을 준비할 이유도, 내년에 내 생일날 전화로 들려줄 생일축하노래를 기대할 이유도, 그 아무것도. 매년 긴 시간들을 그런 틈틈이 있을 사건들만을 기다리며 버텨왔어. 바보 같지? 이해를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지만.. 내가 이제껏 살아온 방식은 이랬는데, 그래서 내일을 버텨내기가 너무 힘들어. 하루에도 몇 번씩, 숨 쉴 때마다, 밥 먹을 때마다 도대체 왜 살고 있지 라는 물음이 들고."



12월 16일


나는 이제껏 그를 생각하며 썼던 글들을 그에게 전달할 결심을 하였다. 내가 원했던 모습의 마무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뜬금없이 전화해서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까망하양셔츠를 달라고 했다. 그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내가 끝끝내 조르자 찾아보겠다고 했다.


깜깜한 밤거리에 나와보니 작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길거리는 눈에 젖어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는 서로의 집 중간쯤에서 만났다. 그는 종이가방에 든 셔츠를 내게 넘겨주었고, 나는 몇 달에 걸쳐 완성한 비밀의 화원 컬러링북과 그 속에 든 엽서와 usb를 넘겨주었다. 그는 너무 춥다며 내 패딩 지퍼를 올려주었다.


나는 어제 우리가 얘기했었던, 결혼식에 대해 말을 꺼냈다. 끝끝내 가지 않겠다는 나의 말에 실망하던 그 사람에게 나는 오늘은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잘 살 거라고. 누구보다 행복할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악수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집에 온 나는 종이가방을 방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약을 한 알 먹고 잠들었다. 계속, 계속 잠이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



그리고 2년 후, 현재까지 그에 대한 기억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당시의 일들을 예전처럼 기억해놓지 않은 탓이다. 어떠한 기억도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띄엄띄엄 기억나는 것들이라고는 좋지 않을 때도, 좋을 때도 있다.

그의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나는 문득 지금까지 모아 온 축의금을 전달할 결심을 했다. 조금씩 조금씩 비상금을 모았더니 백만 원이 되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던 그의 계좌로 돈을 보냈고, 급식소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다소 화를 내며 이런 거액을 보내면 어떡하냐고, 돌려준다고, 계좌번호를 부르라고 했다.


"그 돈은 처음부터 오빠를 위한 거였어요."


나는 계좌번호를 알려달라는 그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그는 이제까지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화난 목소리로 계속 윽박질렀다. 나는 그걸 돌려주면 지폐로 바꿔서 그냥 아무 데나 뿌려버리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먹다 놔둔 급식판을 잊어버린 채, 그냥 화장실 안에 갇혀서 울어버렸다.

그는 그 뒤로 연락이 없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신혼여행을 다녀왔다고, 고맙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가 뭐라고 답장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



훌쩍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대학교 구내 카페에서 잠깐 대화를 했었다. 그리고 조금씩 나눈 카톡 대화들이 그즈음의 나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목소리를 담은 전화통화도, 투닥거리는 만남도 없다. 흐르는 물처럼, 손에 움켜잡으려고 해도 전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사이일 뿐이다.




***



그러고 나서 언제였는지 몰라도, 우리는 다시 대학교 안에서 한 번 만났다.


그가 친한 동기오빠를 만나러 온 김에 나에게도 연락을 해왔다. 이 시기의 기억은 내 머리에서 대부분 지워져서 안개에 가리어진 것처럼 아주 흐릿하게 그 자취만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는 띄엄띄엄 어색한 대화를 했다. 우리 둘 다 직접적인 낱말도 표현도 사용하지 않은 채, 우리가 모른 채 했던 시간들만큼이나 길고 긴 거리를 느릿느릿 걷는 것처럼 실속 없는 대화를 했다. 그 어떤 문장도 그날의 우리를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듯 의미 없는 이야기뿐이었다.

어쨌든 그러고 나서 나는 편의점에서 사 온 스타벅스 커피를 건넸고 그는 아파트 주차장까지 나를 태워주고는 사라졌다.



이전 24화<이런 것도 사랑으로 취급되나요?>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