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만의 퇴사

2부 EP01. 사라진 2022년

by 에스


1년 만에 다시 글을 쓴다.

2022년. 그 1년간의 내 삶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다.

그 1년간, 사실은 많은 일들이 있었다.


2022년 6월 평범한 어느 날의 월요일이었다. 사건 사고도 없었고 밀린 업무도 없이 그저 평범한 월요일이었다. 아침에 출근을 한 나는 갑자기 극심한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평소에 조금씩 스며들어오는 어두운 감정과는 결이 달랐다. 정말 이대로 가다간 죽을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날 오후 바로 상사에게 찾아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담은 매우 길었다. 상사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비난하지 않고, 번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좋은 상사, 좋은 어른이었다.

퇴근 후 박에게도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박은 오히려 이제야 결심을 했냐며 나의 행동에 실망하기는커녕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의 말이 삶이 끝나버린 양 절망스럽던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었는지는 그도 모를 것이다.


이렇게 나는 11년간 근무한 회사를 12년 차에 퇴사하게 되었다.

후련하지도, 시원섭섭하지도 않았다. 그저 좀 살 수 있겠다,라는 기분일 뿐.

하루 24시간의 일과가 단순해졌다. 나는 집에 틀여 박혀 박이 퇴근하기를 기다리며 숨만 쉬는 삶을 보냈다. 박이 퇴근하면 전부터 보고 싶었던 옛날 영화를 보며 저녁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기력이 있으면 아파트 옆 근린공원을 한 바퀴 돌고, 밤이 되면 박과 거실에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박은 안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거실에 누워 잠을 잔다.


그런 생활을 한 달여간 하다가, 7월 말이 되어 제주 여행을 떠났다. 1년에 한 번은 꼭 들르던 제주. 갈 데까지 가버린 이 상황에서 방문한 제주는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나는 서남쪽의 제주를 느끼며 혼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타는 듯한 햇빛 아래 오직 그 태양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들도 보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오설록의 푸른 녹차밭에도 가보았다. 두 번째 게스트하우스에는 그날 투숙객이 나밖에 없었다. 사장님과 나는 소주에 간소한 안주를 곁들여 서로의 인생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로는 공감을, 때로는 질문을 하며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지만 위안을 나었다.


제주에서 돌아와서는 바리스타 학원에 다녔다. 일을 그만두자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작은 카페를 하나 차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소지하고 있는 바리스타 2급 자격증 외에도 창업반 수업을 들어야겠다고 생각다.

바리스타 학원 선생임은 매우 철저한 성격의 중년 남자였다. 기초 용어에 대한 암기와 지식의 이해를 아주 중요시해서 덕분에 안 쓰던 머리를 열심히 써야 했다. 나는 카페 창업의 조건을, 바리스타가 갖춰야 할 지식과 소양을, 기본적인 바리스타 스킬들을 열다섯 번에 걸쳐 배웠다. 매일매일 숙제로 라테아트도 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내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바리스타 창업반을 수료하고 나니 8월이 되었다. 그 사이엔 본가엘 한 번 다녀왔다. 엄마에게는 일을 쉬게 된 것을 거의 통보하는 식으로 말을 꺼내게 되었다. 딸이 극심한 우울증으로 일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그 기분은 감히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다. 엄마는 그 뒤로 두 달여를 매일 우셨다고 털어놓으셨다. 나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하셨다. 날 이렇게 만든 것도, 더 일찍 알아채지 못한 것도 다 미안하단다. 전혀 미안할 일이 아닌데.


본가에서 돌아오면서 나는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8월 말, 문득 다시 제주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제주 서쪽의 한 카페의 알바 모집글을 보고 망설임 없이 바로 연락을 했다. 인력이 부족한 비수기여서 그런지 관련 업종 경력이 전혀 없음에도 합격했고, 8월 31일 모든 걸 아파트 한켠에 고이 아둔 채 제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현재 2023년 3월.

나는 계속 제주에 머물고 있다. 많은 일들을 겪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6개월간의 제주살이 동안 나는 어떻게 변했나.

변한 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죽고 싶고,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고, 인생을 포기하고 싶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땐 집에서 혼술을 하고, 약을 먹고 잠이 든다.


그럼에도 한 가지 변한 게 있다면-삶을 멀리 보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너무 멀어 보이지도 않는 죽을 날만을 내다보며 힘겹게 살아왔다면, 이제는 바로 앞에 닥친 일에 집중한다. 당장 1년 뒤를, 당장 한 달 뒤를, 당장 내일을. 그 순간순간의 나에게 오롯이 집중하고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나에게 적지 않은 변화를 주었다. 더 이상 내일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잠이 들지도 않고, 더 이상 양치를 하거나 씻는 일이 지긋지긋하지 않다. 약을 먹는 것도,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낫기 위해서. 정말 건강해지기 위해서 먹는다. 태도의 전환은 행동의 전환을, 결국에는 삶의 전환을 가져올 것이다. 전환점을 가져다준 것은 다름 아닌 제주.

때문에 나는 제주를 사랑한다. 제주에 영영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