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EP05. B에 대하여
B는 그림 모임에서 알게 된 디자이너이다.
그는 대학생 때부터 일을 하기 시작해서 디자인을 거의 10년이나 해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가 아이패드로 그리는 그림이나, 색연필로 그리는 손그림들은 엄청난 퀄리티를 자랑하곤 했다. 나와 강, 그리고 B와 그의 여자친구는 모두 그림 모임에서 만난 사이인데, 우리 넷은 더블데이트를 자주 하며 가깝게 잘 지냈다.
그러던 중 B는 내 공방에 놀러 와서는 디자인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한다며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10년 동안 디자인을 했고, 디자인이 천직이라고 생각했고, 한 우물만을 파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디자인을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 무얼 하고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니 너무나 암담하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와 완전히 똑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우리 둘 다 한 가지 직업만으로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살아왔고, 다른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뭘 잘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B에게 그래도 디자인은 전문 직종이니 그만두더라도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다고 격려하고, 나도 디자인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B는 선뜻 디자인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디자인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포토샵을 배워서 어느 정도 사진 보정이나 기본적인 편집은 가능한 수준이다. 포토샵과 더불어 일러스트레이터도 기본 지식은 습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배우면 디자인 작업도 가능할 거라고 B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인터넷에서 B가 일러스트 작품 하나를 골라주면, 내가 똑같이 만들어 오는 걸로 매주 과제를 주었다. 과제를 두 개째 하고 나자, 나의 한계를 알 수 있었다. 포토샵은 막힘 없이 사용할 수 있었지만, 일러스트레이터는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나는 어려워하는 부분을 메모장에 적어서 다음 미팅 때 B에게 하나하나 물어보았다. 그는 친절하고 상세하게 기능들에 대해 알려 주었다. 배운 것을 토대로 나는 또 다음 과제를 하는 식으로 공부를 해 나갔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참 재미있다. 동시에 너무나 지루하고 지겨운 작업임에도 틀림없었다. 과제를 할 때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생생하게 느껴질 만큼 재미있었다. 그러나 또한 네모 하나 그리고 비명을 지르고, 또 네모 하나를 그리고 침대에서 바둥거리고의 반복이었다. 지겹지만 재밌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 기나긴 지겨움 끝에 완성된 작품을 보면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배운 내용들을 응용해서 사무실에서 사용할 명함을 디자인했다. 인터넷으로 명함을 주문하자 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100장의 명함이 배송되었다. 생애 첫 명함이라니. 감격스러웠다.
B는 본인의 거래처에서 맡긴 디자인이나, 새롭게 들어온 의뢰들 중 난이도가 낮은 몇 개를 나에게 넘겨주고는 했다. 덕분에 나는 작업을 하며 실력을 키워나가고 푼돈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디자인을 그만두겠다던 그의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모든 거래를 끊고 나자 점점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그를 무섭게 압박했던 것이다. 그는 결국 다시 디자인을 시작했고, 일은 오히려 그전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끊었던 일을 다시 재개하고, 업무 플랫폼을 바꾸느라 한동안 B는 공방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났을까, 오랜만에 B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사이에 얼굴이 너무나 수척해졌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자, B는 간수치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힘없이 말해주었다. 피로가 풀리지 않고, 몸이 이상한 것을 느끼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더니 간수치가 당장 입원해야 하는 수치라는 것이다. 그는 입원하지 않고 그냥 제주로 내려와서 식단 조절을 하고 있다며 지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루에 한 끼 정도만 밥을 먹고 나머지는 채소를 먹어야 하며, 매일 산책을 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 좋아하던 음주는 꿈도 꿀 수 없다.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재택근무를 하는 디자이너라는 삶이 생각보다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며, 나는 몸 관리 잘하라고 진심을 담아 응원해 주었다.
또다시 몇 주 후, 그는 나와 강에게 육지에 올라가게 되었다고 소식을 전했다. 디자이너 여자친구의 직장이 서울 쪽으로 잡힐 것 같아서, 본인도 같이 올라가겠다는 것이다. 아마 빠르면 12월쯤일 거라는 말에 나와 강은 너무나 아쉬웠다. 이방인 같은 제주의 삶 속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의 선택이고, 선택에 따른 책임도 본인이 질 것이기에, 우리는 응원과 격려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삶에 대해 보여주고, 그 삶의 일부분을 나눠준 사람. 나는 그에게 평생 고마워하면서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