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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 Oct 26. 2023

나는 죄인입니다.

3부 EP07. 엄마와의 제주생활



   엄마와 이렇게 오랜 기간 함께 있는 건 16년 만이다.

   엄마는 제주에 온 순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우리 집을 깔끔하게 청소하고, 맛있는 밥을 차려 주신다. 어느 날 가만히 엄마를 지켜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좋은 남자를 만나 집에서 가정주부로 내조를 했다면 정말 행복하게 가정을 잘 꾸렸을 것 같다. 똑 부러지고, 깔끔하고, 음식도 잘하고, 자녀교육도 잘하는 완벽한 엄마. 물론 그보다 더 좋은 건, 본가에서 지원을 받아 공부를 하고 대학을 나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커리어우먼이겠지만, 이것도 저것도 그저 내 상상일 뿐이다. 엄마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는데, 경제적 한계와 잘못된 배우자 선택이 엄마를 이렇게 힘들게 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사무실 정비도 끝나고, 여느 날처럼 엄마와 함께 출근해서 디자인 작업을 하는데 갑자기 극심한 우울이 밀려왔다. 숨을 쉬는 순간마다 정말이지 죽고 싶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엄마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일을 하다 말고 노트북 앞에 한참을 엎드려 있었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곧 다시 고개를 들고 작업을 계속했다.

   퇴근을 하고 집에 오자마자 약과 비상약을 같이 먹었다. 비상약의 효과인지, 30분도 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요즘, 밤은 너무나 짧다. 눈을 감기만 하면 여러 가지 꿈에 시달리며 정신을 혹사당한다. 제대로 잔 것 같지 않은데 눈을 뜨면 아침이 되어 있다. 알람이 울리는 순간과 그 후의 잠이 깨기 위한 십여 분이 지옥 같다. 약 부작용 중의 하나인 졸음과 무기력은 아침에 특히나 나를 더 힘들게 만든다. 엄마는 졸음에서 깨지 못하는 나를 보고 약을 이틀에 한 번씩만 먹으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어떻게든 정신과 약을 끊게 하고 싶으신 마음은 알 것 같았지만, 나는 돌려 돌려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도 약을 먹어야 할 만큼 사실 힘들다고. 엄마는 그 말을 듣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나는 죄인이 된 기분이다. 실제로도 죄인이 맞다. 아마 따져보면 아빠 때문에 운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나 때문에 우셨을 것 같다. 어떤 날은 침대 바닥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우신다. 나는 못 들은 척 천장을 보며 하염없이 누워만 있다.


   사무실 오픈을 하긴 했지만, 홍보도 하지 않았고 식당도 아닌 미술 공방이었기 때문에 손님은 오지 않았다. 가끔씩 그림 모임 사람들이 들르거나, 강이 퇴근하고 와서 그리던 그림을 마저 그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어떤 날은 엄마를 데리고 오일장에도 가거나, 일찍 문을 닫고 바다를 보러 가기도 했다. 엄마는 처음에는 내가 어딘가를 데려가기 전에는 집과 공방 말고는 나가지 않으셨는데, 점차 익숙해지자 동네 한 바퀴를 돌거나 주변 탐색을 시작하셨다. 길치인 나와는 다르게 공간감각이 매우 뛰어나신 엄마는 한번 다녀온 길은 절대 헤매지 않으셨다. 나중에는 나보다 더 공방 주변을 잘 알게 되셔서 나를 놀리시곤 했다.


   어느 날, 사진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주 도두항에서 오래물축제를 하는데, 밤 9시쯤 행사를 마무리하는 불꽃놀이쇼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같이 사진을 찍으러 가자고 하셔서 나는 엄마와 강을 데리고 가보기로 했다.

   도두봉은 나지막한 높이의 오름으로, 등산을 매우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도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저녁 7시쯤 미리 도두봉에 올라가서 포장해 온 치킨을 저녁으로 먹었다. 아직 유명해지지 않은 곳인지, 사람은 별로 없어서 한적하고 시원했다. 나는 엄마에게 수평선을 수놓는 한치배의 풍경을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 주변이 캄캄해지고, 한치 배의 불이 하나 둘 켜지자 엄마는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셨다. 내 DSLR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도 찍어보시고, 혼자 도두봉을 한 바퀴 돌아보기도 하셨다.

   우리는 적당히 구경을 하다가 불꽃놀이 시간에 맞춰서 도두항으로 내려갔다. 사진 선생님은 이미 가장 좋은 자리를 잡아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는 서서 기다리다가, 10분이 넘어도 불꽃놀이 기미가 없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기다렸다. 사람들은 꽤 많이 모였다. 오래물축제가 끝나자 불꽃놀이를 보러 넘어온 것이다. 그러나 불꽃놀이는 제시간에 시작되지 않았고,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1시간여를 기다렸다. 10시가 넘어서야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불꽃놀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사진 선생님은 카메라만 들여다보고 열심히 사진을 찍고, 나는 몇 장 찍다가 포기하고 그냥 눈으로 불꽃의 향연을 감상했다. 엄마는 연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셨는데, 덕분에 사진 몇 장을 건질 수 있었다. 엄마 역시 오랜만에 보는 불꽃놀이가 너무 예쁘다며, 더 길게 해 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움을 내비치셨다.

   그 밤, 밤하늘을 밝고 예쁘게 수놓던 불꽃처럼. 그걸 보고 감탄하고 행복해하던 엄마와 나처럼. 우리가 앞으로 웃을 일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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