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스 Feb 23. 2024

새하얀 벽에 걸린 양귀비 그림

4부 EP01. 첫 전시회 준비

   그림모임에서 만난 최는 산업디자인과 출신이지만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싶은 대학생이다. 아이패드 드로잉으로 마치 손으로 그린 흑백 볼펜화 느낌을 내는 그는 다양한 포즈의 여성을 주로 그렸다. 그는 현재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느라 휴학 중으로, 그림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공방에도 자주 와서 작업을 하곤 했다. 최 덕분에 나도 옆에서 오일파스텔 작품을 그리며 그림에 대한 연습을 꾸준히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최가 서울에서 주최하는 그림 전시회에 참가하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왔다. 한 번도 그림 전시를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새로운 제안이 굉장히 반가웠다. 참가비를 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전시회였지만, 내 그림을 많은 타인이 봐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우리는 각자 전시회 신청을 하고 신청비를 입금했다. 

   전시 참가 신청을 하고 나니 비로소 그림 전시를 하게 된 것이 실감 나면서, 그제야 어떤 작품을 제출할지 고민이 되었다. 오일파스텔로 이것저것 끄적끄적거리던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인 붉은 양귀비를 그리기로 했다. 먹구름 낀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양귀비 두어 송이가 흩날리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흰 배경에 그리고 나니 너무 밝아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검정 도화지를 배경으로 다시 그림을 그려서 겨우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검정 액자를 사서 그림을 넣으니 꽤 마음에 들었다. 최도 자신이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을 인쇄사에 맡겨서 프린트한 뒤 액자에 넣어서 완성했다.


   전시 설치 당일. 우리는 각자 그린 그림을 소중히 안고 비행기에 탔다. 김포공항에서 압구정까지의 기나긴 여정 끝에 우리는 전시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시장은 1층과 지하 1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사방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우리는 지하로 안내받아서 작품을 전시할 공간을 탐색했다. 다른 작가들도 부지런히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서 전시장은 조용하지만 활기가 넘쳤다. 직원은 그림의 분위기별로 작품들을 모아서 전시해주고 있었다. 내 작품은 비슷한 분위기가 없어서 일단 아무 작품도 붙어 있지 않은 새 벽면의 한편에 얌전히 걸렸다. 최의 작품은 인물화가 많이 걸린 벽면에 함께 걸리게 되었다. 우리는 전시장을 조금 둘러보고 기념사진을 찍은 뒤 밖으로 나왔다.

   김포에서 압구정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나는 서울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거의 바로 다시 김포로 돌아가야 했다. 최는 친구를 보느라 서울에 남았고, 우리는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혼자 비행기를 타고 오는 시간이 무언가 뿌듯했다.


   그림 전시를 하긴 했지만, 위치가 서울이었기 때문에 정작 전시 기간에 방문은 할 수 없었다. 대신 최가 중간에 서울에 올라가서 전시회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작품들과 굿즈, 와글거리는 사람들이 사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비록 개인전도 아니고, 비용을 지불하고 참가하는 전시회였지만 무언가 노력을 해서 만든 작품을 다른 사람들이 봐준다는 사실이 무기력에 시달리는 나를 크게 환기시켜 주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그때는 더 멋진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열심히 연습해야겠다.


   그 후로도 최는 꾸준히 공방에 출근(?)을 해서 나와 같이 작업을 했다. 그는 최근 여성과 꽃의 조합에 매료되어서 아름다운 여성을 주인공으로 화려한 꽃들을 화면 가득 배경에 깔기 시작했다. 흑백이었던 그의 그림은 꽃이 등장하면서 점차 색색깔의 컬러를 가지게 되었다. 나 역시 오일파스텔 작품을 제작하면서 인스타툰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제주에 내려와서 겪는 이야기를 담은 일상툰으로, 주변에서 나를 도와주는 다양한 지인들의 스토리도 담고 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나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최가 옆에 있으니 나도 무기력에서 조금씩 벗어나 이런저런 작업들에 충실해지는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이 내 곁에 많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날들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