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스 Mar 09. 2024

버티는 자가 자영업에서 살아남는다

4부 EP03. 급격한 우울


   디자인을 시작한 지 5개월 차가 되었다.

   들쭉날쭉한 업무량과 밤, 낮, 주말이 없는 삶을 체험하고 나니 왜 디자이너 B가 10년 만에 디자인을 그만두려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B처럼 회사 입사로 디자인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작디작은 이름 없는 프리랜서로 시작을 했다 보니 여기서 더 나아갈 길이 보이지도 않는다. 

   공방은 6개월 차인데, 이것 또한 손님이 일정치 않다 보니 불안과 걱정에 늘 시달렸다. 우울하고 미칠 것 같다 보니 밤마도 친구들과 술을 먹으며 놀기 바빴고, 그러다 보면 통장 잔고가 바닥나는 게 보이고, 그러면 다시 또 우울해져서 밤마다 놀고.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이마저도 어느 정도 그러고 나니 무의미해져서, 결국에는 시들해졌다.


   만두가 발치 수술을 하고 나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비상금 중 130여만 원이 병원비로 빠져나갔고, 앞으로 염증 치료를 위해 매일 약을 먹이고 약이 떨어지면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수술을 시켰다면 이 정도까지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을 텐데. 내 우울증 때문에 만두를 방치했어.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자살충동은 그렇게 자주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퇴사하기 전에는 숨 쉴 때마다 극심한 자살충동에 시달렸는데, 지금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렇게까지 죽음에 대한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약의 효과인지 제주의 힐링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좋아진 것은 확실하다.


   새해가 되자 갑자기 디자인 의뢰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메뉴판 리뉴얼이나 명함 제작이 주로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다들 새해를 맞이해서 새 단장을 하는 것 같았다. 어떤 날은 하루에 여섯 건의 거래가 들어와서 며칠 동안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거래를 완료하면서 리뷰를 잘 써주어서 평균 9점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거래를 완료하기 전까지 리뷰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리뷰가 잘 달린 걸 보면 안도하고 뿌듯해하고의 반복이었다. 수정 횟수를 초과하고 끝없이 수정을 요구하는 약간의 진상 손님도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견딜만했다.

   공방은 정기 클래스 손님이 네 명 정도 생겼고, 간간히 새로운 손님이 왔다. 주로 근처에 거주하는 도민들이 방문했고, 어린 초등학생부터 우리 엄마뻘 되는 어머님들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미미한 수입과 소소한 뿌듯함. 공방 수입과 디자인 수입을 합하면 가게 월세만 근근이 채우는 정도가 나왔다. 한숨만 나오는 가계부. 다시 불면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새벽에 두 번씩 꼬박꼬박 눈이 떠졌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지옥처럼 힘들었다. 내가 선택한 자영업이기 때문에 후회할 수도 없었고, 퇴직 전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신규일 때 같이 근무했던 부장님께 전화가 왔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직장 선배님이었기 때문에 깜짝 놀라서 전화를 받았다. 나의 퇴사에 대해 통화하고 난 뒤 내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제야 안부전화를 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제주도에서 공방을 차리고 디자인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축하한다고, 응원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부장님은 잘 계시냐고 물어봤더니, 올해 승진을 하게 되었다며 수줍게 말을 꺼내셨다. 부장님의 승진에 대해 누구보다도 응원하고 있었던 나는 진심으로 축하드린다고 말씀드렸다. 자기 자리에서 충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아랫사람을 가족처럼 살뜰히 챙기던 분. 상냥한 말과 배려하는 행동. 신규 시절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부장님 덕분일 것이다. 예쁜 화분을 챙겨드려야지. 한 통의 전화 덕분에 지친 나날들을 버티고 힘을 낼 수 있는 하루였다.



작가의 이전글 새로운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