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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Oct 21. 2021

나는 베짱이가 되고 싶다.

개미와 베짱이. 누가 더 나은 존재인가?



때때로 '비교'에 나를 가둔다.

끝도 없는 비교. 

내 마음에 문제가 생겼을 때 특히 더 외부로 시선이 향한다.


그러고 보면 '나'를 가장 괴롭히는 상대가 '나'라는 사실은 명백한 fact다.

누가 나를 '비교'의 늪에 데려다 두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누군가와 비교하고 있다.


가만있는 폰을 잡고 카카오톡 프로필을 넘기고,

인스타에 빠까뻔쩍한 사진들을 보며 

나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내 자신인 것이다. 

(그래서 한 때 이런 이유로 카카오톡을 지웠었다.)


대학원에서 '집단상담'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이 이러한 질문을 던저주신 적이 있다.

'자신을 동물이나 형용사로 표현해보라'

 때 나는 불현듯 '베짱이'가 떠올랐다. 


하필 '베짱이'일까.

나는 이미 '개미와 베짱이'라는 동화를 통해서 

개미'는 좋은거, '베짱이'는 나쁜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기에 

'베짱이'라고 말하는 내가 순간 너무 부끄러웠다.


그런데 부끄러움이 지나가가고 나니

처지가 더 명확하게 보였다.


'아, 나는 개미가 되고 싶은 베짱이였구나'. 

'딩가딩가 내가 원해서 기타를 치고 있으면서도,

개미를 보면서 불안해 하고 있는 이도저도 아닌 베짱이'가 

바로 나 였구나.


내가 든 기타를 손에 놓을 생각이 전혀 없음에도

개미를 보면서 불안을 느끼는 베짱이는 얼마나 괴로울까.

이왕 자신의 선택이라면 그 기타치는 시간에

찐 행복을 누려워해야 하는데

그 마저도 자유롭지 못한 나같은 베짱이는

기타를 치면서도 무기력을 경험한다.

가만히 앉아 기타를 치는 듯 보이지만,

머리로는 개미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개미가 될 수 있다면 개미가 되면 된다. 

그런데 정말 나는 '개미'가 되고 싶은가?

이 질문부터 새로 던져보아야 한다.


'베짱이'를 게으름뱅이로 비춰놓은 책도 결국 '남의 소리'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빛깔의 특징있음에도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면 그 고유함이 보이지를 않는다.


'개미와 베짱이'라는 우화가 

베짱이를 게으름뱅이로 만들어버렸지만,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

어쩌면 베짱이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 

현자일지도 모를 일이다.


'증명'에 걸려있는 나는 

늘 무언가를 해야지만 인정받을 것만 같았고, 

가치인간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마음이 결국 나를 더 '가치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개미가 될 수 있다면 개미가 되면 된다. 

그런데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개미'가 더 좋아보였던 나였다.

'개미가 되고 싶은 베짱이'가 나였다.

하지만 평생 감정적으로 아웅다웅 하며 살아서 그런지, 

이제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줄 아는 베짱이'가 

나는 더 행복해보인다.


내가 변할 마음이 없다면, 구지 개미를 부러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개미에게서 눈을 떼라.

비교로 나의 시간을 스스로 갉아 먹지마라.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봐라.


그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나의 결정임을, 나의 욕구임을

'선택' 하고 '책임' 지기만 하면 된다.


내가 '베짱이'가 되고자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참 마음이 참 편하고 행복하다.

아웅다웅 열심히 살아가지 않는 내가 부끄럽기도 했었는데

내가 나를 이해해주고 알아주니 

비난 할 것도

비교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베짱이.

과거의 후회, 미래의 불안보다는

'나의 선택'으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충분히 누리며 사는 

멋진 베짱이가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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