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은 아이의 것이고, 확신은 어른의 것이다

by 신성규

나는 늘 다른 사람의 시각을 이해하려 애쓴다.

사람은 각자의 배경, 상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는 걸 알기에, 가능한 한 그들의 눈을 빌려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는 시선을 세상의 유일한 현실처럼 여긴다.

그들은 말한다. “나는 알아.” “나는 겪어봤어.”

하지만 바로 그 말에서, 나는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는 자의 고집스러움을 느낀다.


아이는 자라며 세상이 넓다는 걸 배운다.

처음엔 자신의 감정이 전부였고, 자신이 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누군가의 울음을 보며, 누군가의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감지하며,

아이는 점점 세상의 폭이 자신보다 넓다는 걸 배운다.


반대로 어른은,

이미 배웠다고 믿고, 이미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세상은 확정된 의미들로 가득 찬 풍경이다.

눈앞의 타인은 설명되지 않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미 설명이 끝난 유형, 범주, 성격, 혹은 “그런 부류”로 취급된다.


이 얼마나 큰 역설인가.

배움이 축적될수록 시선은 넓어져야 할 텐데,

실상은 배움이 쌓일수록 세계를 오히려 축소시켜 버린다.

지식은 감각을 마비시키고, 경험은 해석을 고정시킨다.

어른이란 이름의 존재는 자신이 아는 만큼만 세상을 보려 하고,

모르는 것을 만났을 때는 “그건 틀려”라고 말한다.


나는 안다.

세상을 이해하려면 단 한 번이라도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타인의 시선을 빌려 세상을 보는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존재의 개방성에 관한 문제다.

아이의 눈으로 다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단지 미숙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가능성의 상태로 자신을 돌려세우는 일이다.


사람들이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시선은 안전하다.

하지만 그 안전은 곧 사유의 죽음, 타자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자신이 고립되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고요한 오만이다.


나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을 빌려 세계를 보려 한다.

왜냐하면 그 눈 너머에는,

내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들이 있고,

내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고통들이 있으며,

내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는 연결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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