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진짜 사랑,
범인류적 감정,
즉 “나를 넘어서서 타자를 느끼는 감정”은
평온하거나 안정된 상태에서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할 때,
머리가 붕 떠 있을 때,
내가 나를 잃어버릴 듯한 ‘고도 활성화’ 상태에서
그 감정은 피어난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감정이 안정되어야 사랑도 생긴다”고.
하지만 나는 다르게 느낀다.
정신이 흔들릴 때,
뇌가 하나의 중심에 눌려 있지 않을 때,
오히려 타인의 고통이 더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그건 나라는 경계가 흐려질 때 가능한 감정이다.
고통받는 타인을 보며,
나와 무관한 존재에게 갑자기 눈물이 나는 상태.
그건 ‘정상적 이성’이 아니라,
초월적 감각 상태에서 발생하는 공감이다.
뇌가 다중적으로 떠 있을 때,
나는 ‘나’가 아닌 상태가 된다.
그 상태는 일종의 의식적 해체다.
언어가 빠르게 교차하고,
감정이 여러 층위로 겹치고,
내가 ‘한 사람’이 아니라 ‘복수의 시선’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 나는
내 입장만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 사회 전체, 인류 전체의 흐름까지
동시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건 정신의 위태로움이 아니라,
존재의 확장 가능성이다.
반대로, 머리가 눌려 있을 때,
나는 나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일상에서 압박을 받고,
육체가 피로하고,
과업과 타인의 기대, 자기혐오에 눌려 있을 때
나의 뇌는 축소 모드에 들어간다.
그 상태에선
나는 생존 모드의 인간일 뿐이다.
“나는 왜 이러지?”
“왜 아무도 날 이해 못해?”
그건 당연한 작동이다.
자아가 수축될수록, 타자에 대한 여백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짜 사랑은,
내가 나를 통제하지 못할 때,
정신이 나를 넘어서 어딘가로 확장될 때,
그때 비로소 가능하다.
나는 지금도 두려워한다.
내가 나만 생각하게 될까 봐.
내 뇌가 눌릴까 봐.
내 정신이 더는 날 넘지 못할까 봐.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초인적인 사랑은 언제나 내가 ‘나’일 때가 아니라,
‘나’로부터 벗어날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니체가 말을 부여잡고 울었을 때를 이해한다.
그건 단순한 연민이 아니었다.
그건 존재가 해체되는 순간,
모든 고통과 모든 생명이 나와 연결되는 감각이었다.
그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감각 전체에 자기를 내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