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이 가지는 마음의 가능성을 다 가지고 있다.
그 가능성은 전지전능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하고, 포용하고자 하는 마음의 깊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볼 때
나쁜 점보다 좋은 점이 많은지를 따진다.
좋은 점이 더 많다면, 그 사람을 안고 가는 것.
그것이 인간이 신에게 배운 가장 본질적인 윤리다.
누군가의 나쁜 점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을 놓고 싶은 마음이 앞서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이미 내면에서 그를 밀어내고 있다.
연인 사이도,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늘 좋기만 할 수 없고,
늘 옳기만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랑은
결함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결함보다 더 많은 선을 기억하는 기술이다.
신도 잔인해질 수 있다.
신도 침묵하고, 신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 속 신은 때로 도시를 불태운다.
신도 흔들리고, 신도 시험하고,
신도 고독하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완전해지기를 바라는 건 불가능한 기대다.
우리는 신을 닮았기에,
불완전함을 가졌다.
아무리 초정밀 기계도
그 속엔 오차 허용범위가 존재한다.
오차가 없다는 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살아있는 존재에
오차, 흔들림, 모순이 있다는 건
그가 살아있다는 것의 징표가 된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좋은 것을 보는 눈,
받아들이는 마음,
관계를 지키려는 노력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이고,
우리가 신을 닮았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묻는다.
완전해서 사랑하는가,
아니면 사랑하기에 완전해지는가?
우리는 그 경계에 선,
불완전한 창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