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저 사람의 본질은 뭘까?”
“사물의 진짜 속성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들 속에는 어떤 믿음이 깔려 있다.
바로 본질은 고정된 실체이며,
우리는 그것을 ‘발견’해낼 수 있다는 믿음.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 전통에 반기를 든다.
“본질은 존재의 방식이다. 그것은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이다.”
불교 역시 말한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반응하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단지 심리적 은유가 아니다.
불교는 존재 자체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조건적 발생으로 본다.
사물은 독립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진다.
자아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의식과 기억, 감각이 만들어내는 일시적 조합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과
불교의 무아, 공, 연기는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존재란 실체가 아니라 드러나는 방식이다.
고정된 중심이 아니라, 관계와 상황에 따라 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도, 불교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절대론에 반대한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철학을 공유한다.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현존재를 통해 드러나는 방식이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세상 만물은 고정된 실체가 아닌, 인연과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으로 본다.
또한 하이데거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에 따라 열리고 바뀌는 것이라고 본다.
불교 역시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며, 자아 역시 고정된 중심이 아니라 조건적으로 구성된 것이라 주장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현존재’는 존재를 열어주는 주체로 기능한다.
이와 유사하게 불교에서는 ‘마음’이 곧 세계를 구성하고 해석하는 기반이 된다. 즉, 존재는 인식 주체 없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속에서 구성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이데거와 불교는 모두 존재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며, 본질이란 응답이며 흐름이라는 점에서, 절대적 실체 개념을 거부한다.
이러한 존재론은
힌두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 실체 개념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힌두교는 아트만이 있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신의 형상을 전제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나 불교는
영혼도, 자아도, 신적 본질도 ‘고정될 수 없다’고 본다.
존재는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세계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과 해석을 통해 구성된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와 불교는,
힌두교와 기독교가 공유하는
형이상학적 절대주의와 실체론에 대한 철학적 저항선에 위치한다.
하이데거도, 불교도, 말한다.
너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너는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존재는
응답하고, 움직이고, 구성된다.
본질은 드러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나타남, 열림, 공명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하나의 대답이 아니라, 하나의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허용하는 법을 배운다.
본질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은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에 기대지 않고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