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름다움 앞에서 멈춘다.
그것은 말없이 압도하는 감각의 질서이며,
우리가 쉽게 조작할 수 없는 세계의 하나의 형태이다.
하지만 질문이 있다.
나는 그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 아름다움 곁에 있는 나를 사랑하는가?
어떤 사람은 미인을 보면 그 자체를 찬양한다.
형태의 조화, 빛의 각도, 비율의 질서에 경탄한다.
그 찬양은 마치 눈앞의 대리석 조각상에 무릎을 꿇는 것처럼 순수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아름다움을 소유하거나, 그 곁에 서 있음으로써 내 존재를 강화하려 한다.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 있는 나”는
“더 나은 나”라고 믿는 순간,
아름다움은 대상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그 순간, 미는 더 이상 타자에게 있지 않다.
나는 타인을 매개로 나를 숭배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종종 ‘타자를 향한 움직임’처럼 보이지만,
그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면,
자기애의 미세한 파동이 물결치고 있다.
나는 그대의 눈빛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 눈빛 속에 비친 내 존재의 의미를 사랑하는가?
내가 그대 곁에 있음으로써 나의 결핍이 채워지고,
존재가 증명된다는 그 느낌.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아의 형상을 욕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사랑은
나르키소스의 연못을 확장한 구조다.
그대는 연못이고, 나는 그 물에 비친 자기 이미지에 취한 존재다.
그러나 이제 연못은 타인이 되었고,
나는 타인의 눈을 빌려 나를 들여다본다.
그대가 나를 원함으로써, 나는 가치 있어진다.
그대가 나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존재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깊은 듯 보이나,
실은 깊은 고독의 무게를 타인의 시선으로 겨우 지탱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 사랑은 타인을 향하는 듯 하지만,
실은 자신의 빈 자아를 겨우 매만지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구조를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이며,
모든 사랑은 어느 정도의 자기애적 반사광을 품는다.
중요한 건 그 반사광이 타인을 지우는 정도까지 자라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가 내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넘어서,
그대 자체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게 두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그대를 바라보며 느끼는 모든 감정과 경탄을
그대 없이도 순수하게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자기애를 조심스럽게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