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적으로 맞는 걸 좋아한다는 여자들을 종종 봐왔다. 이게 쇼킹한 일 같지만 심리를 이해해보면 그렇지만은 않고 대단히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현실이나 삶의 복잡한 책임, 고민, ‘존재의 피로’가 클수록 강한 육체적 자극(=구타 등)은 ‘나는 존재한다’는 느낌을 즉각적으로 되살릴 수 있다. 이때 고통은 존재 증명으로 작용한다.
맞는 걸 좋아하는 여자의 심리는, 단순한 가학·피학적 욕망을 넘어, 훨씬 더 깊고 복잡한 층위를 품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주도성’을 강요받는다. 결정하고, 책임지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모든 무게를 내려놓고 싶어진다. 그 무게를 내려놓는 방식이 고통을 통해 오는 것일 때, 인간은 주도권을 내려놓고 수동적 존재로 변한다. 맞는 순간, 삶의 모든 고민은 사라진다. 오직 육체적 감각만이 현재를 지배하고, 존재는 순간순간 살아 있는 고통 자체로 환원된다.
이 심리에는 또 다른 결이 있다. 맞는 것은, 사랑을 증명받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일 수도 있다. 고통을 감내하는 나를 통해, 타인의 관심과 애정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벌을 받으면서 동시에 사랑과 관심을 받으려는 심리. 아픔을 통해 애정을 확인하거나, 존재 가치를 재확인하려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이 작동할 수 있다. 삶이 너무 무겁고, 자신이 너무 사라진 것 같을 때, 인간은 고통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시 존재를 확인하려 든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비난받아야 할 병리현상만은 아니다. 고통 속에서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자아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억압되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고, 삶을 새롭게 느낄 수 있게 된다. 삶은 때때로 사랑과 고통이 얽힌 채 찾아온다.
결국 맞는 걸 좋아하는 여자란, 삶과 존재, 사랑과 고통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녀들은 남들보다 더 선명하게 ‘존재한다’는 감각을 갈구하고, 남들보다 더 치열하게 삶을 끌어안으려는 이들이다.
우리는 이런 심리를 단순히 비정상으로 단정짓기보다,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섬세함을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바라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