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주의자의 고백

by 신성규

“유미주의는 어려운 거야.”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건 현실과 안 맞고,

쓸모없고,

허영스럽고,

결국은 자기만족일 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반문한다.

아름다움이 이해받지 못하는 사회야말로 병든 사회 아닌가?


사람들은 “이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다.

그림 하나, 시 한 줄,

아름다운 음악 한 곡에조차

“쓸모”를 따진다.


그 질문은 차라리 이렇게 바꿔야 한다.

“우리가 왜 이렇게 쓸모 있는 것만 남기고 살아야 하지?”


유미주의는 말한다.


“쓸모 없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

바로 그게 존엄한 것이다.“


유미주의는

무조건 감각을 따르는 쾌락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미묘한 감각의 훈련이다.


섬세한 색감의 차이를 감지하고,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포착하고,

설명되지 않는 감정에 울컥하며,

아름다움 앞에 무너질 줄 아는 능력.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정보를 빠르게 넘기고,

예술도 소비 속도로 평가하며,

“예쁘다”는 말조차 기능적으로만 쓴다.


우리는 점점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대중은 종종 유미주의를 오해한다.

그건 자기애, 사치, 현실 도피라고.

그러나 진짜 유미주의자는

세상에 등을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세상 속에서

더 날카롭게 느끼고, 더 깊이 상처받고,

그걸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리는 사람이다.


유미주의는 불편한 도피가 아니라,

삶을 견디는 마지막 품위다.


나는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잘 느끼고, 잘 감탄하고, 잘 표현하는 인간이고 싶다.


나는 하나의 색에 멈추고 싶고,

하나의 문장에서 숨이 멎고 싶다.

나는 나를 감각으로 흔드는 무엇을 사랑하고 싶다.


그게 유미주의다.

그건 멀지도, 어려운 것도 아니다.

단지, 잊혀졌을 뿐이다.


유미주의는 허영이 아니다.

유미주의는 눈물이다.


그것은 이 세계가 여전히

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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