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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의 건반

by 신성규

가끔 피아노를 치면

내가 피아노를 치는 건지,

피아노가 나를 치는 건지 알 수 없어진다.


그 음계는 너무나 정직하다.

낮은 음은 우울하고,

높은 음은 흥분된다.

그 사이의 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중간의 감정’이란 없다는 듯.


바이올린은 너무 예민하고,

첼로는 너무 깊다.

기타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 같고,

드럼은 아예 외부와 맞서려 든다.


하지만 피아노는,

그 모든 감정을 혼자 가진 악기다.


그 음폭은

우울증과 조증 사이를 뛴다.

왼손의 낮은 음을 누르다 보면

내 마음이 가라앉는다.

검고 둔탁한 그 울림은

깊은 밤의 바닥 같다.


그러다 오른손으로 올라가면

빛의 속도로 정서가 튀어오른다.

갑자기 삶이 유쾌하고,

모든 일이 가능할 것 같아진다.


이 얼마나 완벽한 조울증인가.


조울증은 감정의 고장이라기보다는

세계와의 연결 방식 자체가 달라진 상태다.

피아노도 그렇다.

도에서 미, 미에서 솔,

하나하나의 건반은 멀쩡한데,

그걸 잇는 사람의 손에서

정서가 비틀린다.


내가 누르지 않으면

피아노는 조용하다.

하지만 내가 눌렀을 때,

그 반응은 너무나 정직해서

도망칠 수 없는 감정의 파도처럼 밀려온다.


어떤 날은 왼손의 낮은 음만 친다.

세상이 축축하고,

마음이 눌려서

단 한 음조차 올라가기가 두렵다.


어떤 날은 오른손만 논다.

쉴 틈 없이 희망차고,

기분이 폭발하듯 밝아진다.

그러다 결국,

손이 맞닿는 지점에서

내가 무너진다.


피아노는 그렇게

나의 정서를 소리로 고백한다.

그리고 그 고백은,

언제나 조금씩

불안정하게 아름답다.


사람은 감정의 음계를 따라 산다.

늘 같은 자리에서,

다른 높이의 감정으로 울린다.


어쩌면 인간이 악기라면,

우리는 모두

피아노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서

끝없이 오르내리는

정서의 연주자.


그리고 어떤 날은

그 피아노를 치다가

문득 깨닫는다.


아, 나는 내가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연주되는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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