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단순한 문장 생산자가 아니다.
그는 사물의 감각을 구조화하고,
구조의 틈에 감정을 흘려 넣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시인은 누구보다 똑똑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패턴을 보고,
감정의 미세한 결을 언어로 전환하는 사람.
지성 없이 시는 한 줄도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똑똑함은 도구이고, 순수함은 존재다.
지적인 사람은 많다.
그들은 빠르게 분석하고, 의심하며,
사물의 본질을 해부할 수 있다.
그러나 해부하는 순간,
대상은 시가 아닌 ‘정보’가 되어버린다.
시인은 정보를 멈추고 느낌을 살리는 사람이다.
문제는,
지성이 강할수록 순수를 부정하게 된다는 것.
의심하는 능력은 자주 감동을 말살하고,
메타 인식은 경험을 피상화시키며,
똑똑함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으로 쉽게 빠진다.
그래서 순수함을 지킨다는 건,
세상을 뚫어본 눈으로 다시 아이의 눈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눈을 진짜로 다시 가지는 것이다.
순수란 무지나 무식이 아니다.
순수란, 다 알고도 다시 감동하는 능력이다.
다 해석하고도,
그 해석을 내려놓고 느낌으로 돌아오는 힘이다.
어른이 되어, 다시 꽃을 보고 놀라는 능력
사랑의 구조를 이해하고도, 사랑에 울 수 있는 마음
사회의 잔혹함을 인식하면서도, 인간의 따뜻함을 믿는 신념
이것이 시인의 순수다.
그는 무지하지 않고, 그럼에도 희망한다.
그는 허무를 본다. 그럼에도 쓴다.
지성은 노력으로 가능하다.
그것은 훈련 가능하고, 속도와 깊이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순수는 훈련되지 않는다.
순수는 ‘살아남아야 하는 무엇’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너무 많이 깨닫고, 너무 많이 절망하고,
너무 많이 실망한다.
그때 많은 예술가들이
지성은 남기되, 순수를 잃는다.
그들은 잘 쓰는 법은 알지만,
더 이상 감동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술은 늘고, 시는 사라진다.
지성은 나를 무장시키지만
순수는 나를 노출시킨다.
시인이 되기 위해 나는
세상에 대해 계속 배우되,
세상에 기대하는 마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나는 더 정교하게 사고하되,
더 무방비하게 사랑해야 한다.
나는 알고도 울 수 있어야 하며,
깨달아도 설렐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결국,
지성의 끝에서 순수를 보존한 자다.
똑똑함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무기고,
순수함은 세상을 다시 사랑하기 위한 조건이다.
전자는 쉬울 수 있다.
후자는, 오직 고독하게 살아남은 이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순수를 지키기 위해 시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