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가슴을 만지고 싶어.”
이 문장은 직설이다.
욕망은 솔직할 수 있다.
하지만 솔직함이 언제나 아름다움을 보장하진 않는다.
사람은 본능을 말로 옮길 때,
그 본능에 윤리의 피부를 입힌다.
언어는 감각을 포장하는 천이고,
욕망은 그 안에 싸여야 아름다움이 된다.
“너의 마음을 만져보고 싶어.”
이 말은 감정의 차원으로 욕망을 이끈다.
육체에 대한 갈망이
정서로 변형되고,
그 정서는 접촉이라는 행위 자체의 의미를 전환한다.
그것은
‘가질 수 있음’이 아니라
‘닿고자 함’이다.
함부로 쥐는 손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머무는 손끝이다.
욕망이 미학이 되려면,
그것은 거리감을 자처해야 한다.
접촉이 아니라 접촉 직전,
그 긴장 속에서 피어나는 절제의 감각.
‘가슴’이라는 단어는 너무 육중하다.
너무 가깝고, 너무 빠르며,
너무 해명적이다.
반면 ‘마음’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고, 닿을 수 없으며,
그래서 더 간절해진다.
언어는 욕망을 고백하는 도구이지만,
언어는 동시에 욕망을 숨기는 기술이기도 하다.
욕망을 정제할 수 있을 때,
그 욕망은 아름다움이 된다.
육체는 즉각적이지만,
마음은 지연된 접촉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가슴을 만지고 싶다’는 욕망을
‘마음을 만져보고 싶다’는 문장으로 바꾼다.
그것은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그것은 예의이자, 미학이자, 사랑의 언어적 승화다.
그리하여,
내가 정말 원한 건 무엇일까.
너의 피부가 아니라,
너의 떨림.
너의 살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무언가.
나는 네 안에 있는 것에 닿고 싶다.
그 닿음이 진짜 닿음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너의 마음을 만져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