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 감상기

by 신성규

문동은은 복수를 완성했다.

그녀는 피해자였고, 끝내 세상을 설득해 가해자를 무너뜨렸다.

폭력의 피해자에서 정의의 수행자로,

그녀는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고, 우리는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나는… 그 모든 장면이 끝난 후,

문득 예솔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아이는 이야기의 주인공도, 서사의 중심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문동은보다 예솔이를 더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복수가 끝난 자리에 남은, 말하지 않은 사람.


나는 예솔이를 보며 불편했다.

안타까웠고, 슬펐고, 동시에 무언가를 알아버린 듯한 불쾌감이 스쳤다.

그건 단순한 연민이 아니었다.

예솔이란 존재를 통해 내가 보게 된 것은,

복수가 정의일 수는 있지만, 결코 무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문동은의 복수는 명확하고도 정당하다.

누구도 그녀의 고통을 부정할 수 없었고,

그녀의 전략은 냉철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설득력을 가졌다.


하지만 내가 ‘더 글로리’를 다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남았던 감정은

‘통쾌함’도, ‘감동’도 아닌

묵직한 잔여감, 말하자면, 정의 이후의 공허였다.


그리고 그 감정을 얼굴에 고스란히 달고 있는 인물이 바로 예솔이었다.


그녀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피해자의 복수로 인해 삶이 뒤틀린 사람이다.

그녀는 선택된 적이 없다.

문동은의 칼날은 명확히 가해자만을 향했지만,

그 칼이 지나간 자리에서 한 아이의 미래가 찢어졌다.


이건 문동은의 잘못인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정의는 수행되었지만,

그 행위로부터 비롯된 또 다른 상처의 계보는 이어진다.


예솔은 성장하며 어떤 감정을 품게 될까.

엄마는 한때 폭력의 주체였고,

문동은은 복수의 수행자였지만 동시에 또 다른 무관심한 어른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누군가의 부연 설명으로만 소비된다.

그것이 내가 예솔이를 보며 가장 고통스러웠던 이유다.

이 아이는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항상 ‘누군가의 결과’로만 존재한다.

그 자체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보며 내 안의 도덕적 확신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정의는 끝났지만,

복수의 윤리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더 글로리’는 문동은의 이야기로 완성되었지만,

진짜 서사는 예솔이로부터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단지 속편이나 후속작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한 서사의 그림자에서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가,

그걸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나는 예솔이를 통해,

복수 이후의 인간,

정의의 사각지대,

그리고 말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한 윤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문동은의 승리보다

예솔의 침묵이 더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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