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예술 감상법

by 신성규

나는 종종 너무 똑똑해진다.

예술 앞에서조차.

그림을 보기 시작하면, 나는 무의식중에 구도를 분석하고, 맥락을 찾아낸다.

어떤 철학자의 이론을 대입하고, 그 사조의 특징을 끌어다 붙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예술을 놓치고 만다.


예술은 해석될 수 있지만,

해석되기 전에는 반드시 느껴져야 한다.

그 감각의 층위가 없으면, 모든 분석은 공허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감각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이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해석학을 재정립하면서,

예술 감상이 단순한 분석이나 주석의 행위가 아님을 강조한다.

그는 예술을 놀이, 축제, 상징의 범주에서 이해한다.


“작품은 그 자체로 완결된 세계이며,

관객은 그 세계에 들어가면서 자신을 잊는다.”


예술 감상이란 일종의 수용의 변형 경험이다.

우리는 예술을 분석하기 이전에,

그것 안에 들어가야 한다.

가다머는 이 과정을 지평의 융합이라 부른다.


작품의 세계와 내 삶의 세계가 충돌하고, 겹쳐지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이해가 나도 모르게 생긴다.


이것은 이성의 작용이 아니라, 체험의 작용이다.

이해란 정리된 생각이 아니라, 나도 설명할 수 없는 공명 속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분석은 감상 뒤에 와야 하며,

감상을 대체할 수 없다.


메를로퐁티는 훨씬 더 급진적이다.

그는 예술을 “보여지는 것을 넘어, 보여지는 방식을 드러내는 힘”으로 본다.

『지각의 현상학』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는 세계를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살아가며’ 아는 것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잔의 회화를 예로 들며,

예술은 “사물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경험하는 방식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철저히 지각적 체험이다.

눈, 손, 숨결, 존재 전체로 느끼는 것이다.

해석은 여기서 2차적이다.

분석은 나중에 따라오는 설명일 뿐,

예술이 우리에게 오는 방식은 훨씬 원초적이다.

그건 곧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움찔한다.

내가 너무 자주 머리로만 예술을 이해하려 했다는 자각 때문이다.

내 몸은 이미 어떤 반응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설명 가능한 말로 환원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것이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말한다:

“몸은 생각하기 전에 이미 안다.”


예술 감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를 견디는 일이다.

나는 이 그림이 왜 아름다운지 설명하지 못하고,

이 음악이 왜 아픈지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감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감상은 거기서 시작된다.


나는 똑똑해질수록, 설명하려는 강박이 커진다.

그러나 예술은 종종 설명될 수 없고,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이다.


감상은 모름에서 온다.

분석은 내가 주도하는 것이지만,

감상은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감상은 때로 수동적이어야 하며,

그 수동성 속에 가장 능동적인 감정이 자란다.


가다머는 감상을 진리의 사건,

메를로퐁티는 그것을 지각의 환기라고 불렀다.

둘 모두, 예술이 머리를 뚫고 들어오는 무엇임을 알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해석하려는 자아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예술을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똑똑해지지 않기 위해 애쓴다.

느끼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그 설명할 수 없는 것들과 조금 더 오래 함께 있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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