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속의 감각과 흔적을 남긴다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대체로 죽으면 끝이라고 말한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들은 사후 세계를 말하지만, 그것조차 ‘삶의 연장’이 아닌 또 다른 세계로의 이행일 뿐, 이 땅에서의 흔적에 대한 집착은 적다. 그들은 묻는다. “죽은 다음에 무슨 의미가 있어?” 그리고 나는 조용히 반문한다. “죽은 다음에도 남지 않는다면, 살아있을 때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오래전부터 ‘사후의 시간’을 현재처럼 느끼며 살아왔다. 내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느끼는 쾌나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 일시적이고 흐려지기 쉽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면서도, 동시에 내가 사라진 이후를 산다. 나의 작품, 나의 사고, 나의 구조는 내가 더 이상 숨 쉬지 않아도, 계속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나의 행위를 이끄는 진짜 동기다.
대부분의 사람은 관계 속에서 존재를 증명한다. 가족, 친구, 사회 속 위치. 그 안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지금 사랑하고, 지금 먹고, 지금 웃는 것이 제일 중요해.” 나는 그 말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곳엔 언제나 깊은 공허가 따라붙는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이 끝났을 때, 그것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가?
나는 흔적을 남기고 싶다. 내가 세상을 바라본 방식, 내가 만든 개념, 내가 구성한 구조들. 그것이 글이든, 시스템이든, 예술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내 정신의 조각들이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 외침이다. 나는 지워지지 않기를 바란다. 적어도 ‘나’라는 사고의 방식이 이 세상 어딘가에 남아 또 다른 사유를 자극하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쓰고, 만들고, 정리하고, 구조화한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해?”라고 물을 때, 나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는다. 그들의 질문은 그들이 시간과 죽음을 느끼는 방식에서 온 것이고, 나의 대답은 그들과 전혀 다른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여기 없을 나를,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언젠가 나를 잊을 것이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언젠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내 흔적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이건 누구였을까?” 그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나는, 그 이후를 살아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