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냄새로도 진화한다.
우리는 말로 문명을 만들었다고 믿지만, 실은 몸에서 풍기는 냄새와 감정에서 스며 나오는 기운이 더 오래된 진실을 말해준다.
젖먹이 아기의 변은 거의 냄새가 없다. 어미의 젖만을 섭취하는 아기에게선 동물의 체취나 잔혹함이 없다. 그 시기의 인간은 순하고, 보호받아야 하며, 본능보다 의존의 존재다. 그러나 아이가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 몸은 다르게 반응한다. 입에서 나오는 숨, 땀의 톤, 그리고 대변의 냄새마저도 달라진다.
더 진하고, 더 진득하며, 더 동물적이다.
육식은 단백질 섭취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의 전이된 형식이다. 우리가 피를 흘리지 않고도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폭력을 ‘위임’하는 데 성공했지만, 몸은 여전히 그것을 기억한다. 고기는 단백질이지만, 동시에 기억이다. 피의 기억, 죽임의 기억, 사냥의 기억.
그리고 이건 인간만이 느끼는 게 아니다.
동물들은 도축업자를 안다.
그들의 냄새, 눈빛, 몸에서 흘러나오는 무언의 진동을.
양들은 도축장의 공기를 감지하고 몸을 떨며, 소들은 도축자의 손을 보기 전에 이미 뒤를 돈다.
살생의 분위기는 물리적이지 않다.
그건 냄새가 아니고, 소리가 아니고, 그냥 공기 중에 떠다니는 기운이다.
폭력은 냄새가 없다 해도 감지된다.
그리고 그 감지는 동물과 인간의 깊은 감각 안에 침투해 있다.
고기를 먹는 인간에게서 풍기는 어떤 ‘진동’도 마찬가지다.
나는 채식을 하면 나의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을 느낀다.
숨이 깊어지고, 냄새가 줄어들며, 감정이 조용해진다.
분노의 촉수가 둔해지고, 불안의 파동이 낮아진다. 마치 폭력이 빠져나간 육체처럼.
나는 채식이 인간의 끝단에 있는 문명화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고기를 먹지 않는 인간은 약한 게 아니라, 그 폭력성을 통제할 줄 아는 인간이다.
피를 보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인간.
냄새 없이도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인간.
아기처럼 순한 채로,
하지만 세상을 꿰뚫는 눈을 가진 존재.
그게 어쩌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의 인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