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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조롱, 새로운 질서

조롱이라는 방식의 진지함

by 신성규

예술은 종종 진지함을 벗는다.

광기의 외피를 두르고, 체제를 비웃으며 등장한다.

그것은 질서를 우스꽝스럽게 뒤틀고, 성스러움을 모욕하며, 전통을 해체한다.


하지만 그 조롱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것은 숨 막히는 세계에서 새로운 숨을 틔우기 위한 창조의 기도다.

파괴는 종말이 아니라, 가능성의 서곡이다.


마르셀 뒤샹은 변기를 ‘예술’이라 주장했다.

“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미술관에 출품했다.


그는 다만 하나의 물건을 ‘다르게 맥락화’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행위는 예술의 본질이 ‘창조물’이 아니라 ‘개념’일 수 있음을 드러냈다.

그의 조롱은 결국 개념미술과 현대예술의 시작점이 되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세상의 구조를 흐물흐물 녹여냈다.

그의 시계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녹는다’.

무의식이 현실보다 더 선명하게 화면에 배치된다.


그의 왜곡은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새로운 내면 질서에 대한 은유적 묘사다.

그는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세계가

실은 이미 해체된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르네 마그리트는 파이프 그림 아래 이렇게 적었다.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림은 파이프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단지 이미지일 뿐이다.

이 말은 단순한 언어 유희가 아니다.

그는 기호의 세계가 현실을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의 조롱은 우리를 현실로부터 떼어놓은 ‘의미 체계’ 자체를 파괴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묻는다:

“우리가 믿는 현실은 얼마나 허구적인가?”

이것은 기호와 실재의 구조를 다시 쓰려는 창조적 시도였다.


달리, 뒤샹, 마그리트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질서를 부수었다.

그러나 공통점은 명확하다.

그들의 조롱은 무(無)의 찬양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 질서, 개념 질서, 기호 질서를 향한 창조의 욕망이었다.


파괴는 창조의 서곡이다.

그들은 파괴를 통해 ‘다르게 보는 법’을 제안했고,

그 제안은 하나의 철학이 되었다.


예술은 욕망의 언어다.

그리고 욕망은 결코 현재의 질서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틀을 넘어서는 구조를 원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파괴자는 예술가이며,

진정한 예술가는 파괴를 통해 보이지 않던 세계를 건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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