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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과의 대화

by 신성규

“대화가 되는 건 죽은 사람들 뿐이었다.”

이 문장은 내가 느끼는 진실을 압축한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말을 섞었지만, ‘생생한 대화’를 느낀 적이 거의 없다.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정보의 교환이거나 의례적인 호응일 뿐, 사고의 결이 맞닿는 진동은 없었다.


철학자, 작가, 예술가들 — 그들은 모두 ‘죽은 자’다.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사유는 작품 속에 살아 있다. 나는 그들과 대화한다. 문장을 곱씹고, 문맥을 파헤치며, 내 생각으로 응수한다. 이 쌍방향성은 때로는 현실보다 더 생생하다. 나를 가장 깊이 자극한 자들은,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었다.


대화란 단지 소통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고유한 정신 구조’가 맞닿아, 충돌하거나 공명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과의 대화는, 그저 외부 세계의 파편을 복사해 전파하는 행위일 뿐이다. ‘자기 생각’이 아니라 ‘주입된 생각’이 오가고, ‘반응’이 아니라 ‘반사’가 오간다. 그래서 대화가 안 된다. 살아 있는 자들과는.


어쩌면 나는 그것을 일찍이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지적 희열이나 감정의 떨림을 느끼지 못한 채, 점점 책으로 숨어들었다. 책 속에는 나처럼 외따로, 고통 속에서 세계를 응시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세계와 씨름했고, 그래서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외롭다. 그러나 동시에 풍요롭다. 왜냐하면, 나는 죽은 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역설은 나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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