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의 황금기,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의 시대에는 글자 수에 따라 원고료가 책정되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작가들을 ‘장황하게 만든다’며 비판도 받았지만, 나는 그것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제도였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간결함’이라는 이름으로 가벼움과 얕음이 횡행하는 출판 시장을 보면 그 시대의 방식이 일정한 사유의 밀도를 강제하는 장치였다고 느낀다.
물론 글자 수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깊은 사유가 담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글자 수가 적고, 거기다 사유까지 부실하다면, 그것은 단순한 간결함이 아니라 성찰의 결핍이다. 나는 요즘 출판되는 국내 도서 중 일부를 보면, 그저 트렌디한 키워드를 재조합한 얕은 사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느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말을 적는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정신적 행위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마주한 많은 글들은 ‘정신의 부재’를 드러낸다. 그것이 바로 게으른 글쓰기다.
게으른 글쓰기는 생각이 빠진 글이다. 단순히 글자 수가 적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유행하는 말들을 조합해 흉내는 내지만, 사유의 뼈대가 없다. 인용을 남용하거나, 플랫폼의 문법에 기댄 채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문장은 간결하지만 내용은 공허하며, 익숙한 문장을 반복하면서도 단 한 번도 자기 문장으로 진입하지 않는다. 그런 글을 읽고 나면, 내 안의 어떤 정신이 마치 납작하게 눌린 듯한 기분이 든다. 사고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일종의 윤리적 분노를 느낀다. 지적 게으름, 그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공성의 타락이다. 책은 사유를 확장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도구인데, 그것이 독자에게 깊이를 제공하지 못할 때, 그것은 단순히 ‘못 쓴 책’이 아니라 책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린 결과물이다. 이럴 때 나는 글을 쓴 사람에게 ‘게으른 자’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글쓰기는 독자에게 아무런 정신적 긴장을 유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고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글이다.
간결함은 미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의 응축을 전제로 할 때만 그러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사유의 윤리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리고 때로는 물리적 분량이라는 고전적인 장치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글쓰기가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물리적인 손의 노동뿐만 아니라 정신의 노동이다. 자기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고의 땀방울이 묻지 않은 글은 단번에 티가 난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다보면 불쾌함을 느낀다. 그것은 글이 나를 자극하거나 도전해서가 아니라, 너무 쉽게 쓰였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런 책을 보면 나는 종종 ‘이건 천재가 아닌 게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쓰려고 한 적조차 없는 글이다’라고 느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너무 빨라졌고, 너무 쉽게 읽히기를 바란다. 글은 사고가 아니라 상품이 되었고, 책은 질문이 아니라 키워드로 소비된다. SNS의 문장들은 클릭을 위해 간결해지고, 출판 시장은 독자의 지성을 신뢰하기보다는 ‘팔리는 문장’을 선택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글쓰기는 점점 가벼워지고, 그 속도에 맞추기 위해 작가들조차 사유를 생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그렇게까지 해서 왜 쓰는가? 글을 쓴다는 건 세계를 구성하고 독자를 움직이는 일이며, 최소한 어떤 진실과 고통을 통과한 사람만이 갖게 되는 내적 권리라고 믿는다. 그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차라리 쓰지 않는 것이 낫다. 글은 나를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나를 다시 구성하는 도전이어야 한다.
게으른 글쓰기가 범람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잘 쓴 글’보다 ‘정직하게 쓴 글’을 찾아야 한다. 생각의 뿌리를 끝까지 따라가본 흔적, 문장마다 고민의 잔해가 묻은 글,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스스로를 무너뜨린 시간. 그것만이 우리를 다시 쓰게 만들고, 읽게 만들며, 나아가 존재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