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진스키 재평가론
미국 사회의 양극화는 날로 심화되고 있다. 경제적 지표로 보자면 최상층과 최하층은 극단의 반대편에 서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중독’이라는 같은 구덩이에 빠져 있다. 부유한 자들은 고급 약물과 합법적 처방에 의존하고, 가난한 자들은 거리에서 구할 수 있는 값싼 마약에 무너진다. 약물이라는 매개는, 자본주의의 두 얼굴이 실은 같은 신체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는 욕망의 과잉이고, 하나는 고통의 과잉이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인간은 ‘살아있음’이 아니라 ‘견뎌냄’을 위해 중독된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잔인함이다. 그 시스템 아래에서 인간은 욕망하거나, 탈출하거나 — 어쨌든 중독되어야만 한다.
이 세계는 발전한다. 하루가 다르게 기술은 진보하고, 효율은 높아지며, 연결망은 확장된다. 그러나 그 발전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향한 발전인가?
문제는 여기 있다. 발전은 중립적이지 않다. 오늘날의 발전은 ‘중독을 유발하는 발전’이다. 플랫폼은 우리를 더 오래 붙잡기 위해 도파민 알고리즘을 연구하고, 금융은 중독성 자극을 상품화하며, 교육과 노동은 감정 없는 반복을 경쟁이라 부른다. 우리는 ‘중독을 생산하는 기계 안의 톱니바퀴’가 되었다.
발전은 쾌락의 과잉을, 중독은 감정의 결핍을 낳는다. 이 둘이 서로를 먹여 살리며, 인간은 자기 삶의 중심이 아닌, 시장의 리듬에 따라 반응하는 수동적 피조물로 전락해간다.
테드 카진스키, 일명 유니바머. 그는 폭력을 택했기에 대중에게 비난받았고, 일부는 그를 광인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의 선언문을 읽어본다면 쉽게 넘길 수 없는 통찰이 있다. 그는 기술 문명이 인간을 어떻게 ‘기계의 부속품’으로 만들고, 자율성과 자유의지를 말살하는지를 절규했다. 그에게 있어 진짜 문제는, 인간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탈진, 우울, 중독. 어쩌면 그의 예언이 실현된 모습일지도 모른다. 유니바머는 ‘기술 그 자체’보다도, 기술이 인간의 존재 방식을 구조화하는 그 방식에 반기를 든 것이다.
지금, 이념은 싸운다. 보수와 진보, 자유와 평등, 자본과 정의. 그러나 그 싸움은 점점 더 추상적이고 형식적이 되어간다. 서로 다른 깃발 아래 있지만, 그들은 같은 기술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다. 정치적 진보와 보수는 같은 방식으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알고리즘을 운영하며, 주목도를 설계한다.
결국 이념은 기술에 의해 포획된다. 인간은 점점 감각을 차단하고, 직접 만나는 대신 알고리즘으로 필터링하며, 관계를 맺기보다 효율을 따진다. 우리는 사유하는 인간에서, 반응하는 인간, 아니 자동 반응하는 시스템의 일부로 전락한다.
이것이 ‘기술적 자폐’다. 감각은 닫히고, 구조는 강고해지며, 인간은 스스로를 진단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를 중독시키고, 중독을 통해 성장하며, 그 성장을 ‘문명’이라 부른다. 그러나 진짜 문명은 중독의 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중독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제 질문해야 한다. 이 발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는 왜 이토록 탈출하고 싶은가?, 그리고 이 중독의 고리를 끊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기술에 저항하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에게 돌아가는 감각 — 말, 몸, 관계, 고요 — 그런 원초적 인간성의 회복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