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초와 실로시빈은 왜 금지되었는가

노동시장과 자본주의에서 중독의 정치학

by 신성규

대마초와 실로시빈은 과연 위험한 물질일까? 아니면 현실을 지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체제에 위협이 되는 식물일까?


우리는 흔히 유해성을 기준으로 약물의 위계를 정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담배와 술은 종교적 이유가 아닌 이상 전 세계 어디서나 합법이며, 대마초는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불법이다. 문제는 여기 있다. 유해성의 순위가 아니라, 사회적 통제의 기준이 법적 지위를 결정해왔다는 점에서다.


현대 사회는 중독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담배, 알코올, 커피, 설탕, SNS, 심지어는 일에의 몰입조차도 시스템에 이롭기만 하면 장려된다. 그러나 대마초와 같은 자기 탐색적, 탈생산적 중독 가능성은 위험으로 간주된다. 이 모순은 단지 위선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다.




대마초는 일반적으로 긴장 완화, 창의성 증가, 느려진 시간 감각, 몰입의 변화 등을 유도한다. 이는 속도와 효율성, 지속적 생산성을 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노동 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러나 대마초는 노동을 재구조화하려 한다. 즉,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을 만들어낸다.


담배는 니코틴 의존과 각성 작용으로 노동의 지속성과 집중력을 보완한다. 카페인은 정신을 각성시키고, 피로를 잠시나마 억제한다. 술은 퇴근 후 해방의 배출구로 기능하며, 생산적 스트레스를 보상하는 메커니즘이다. 설탕과 SNS는 즉각적 보상을 제공하면서 사용자 체류 시간을 늘린다.


이러한 중독들은 체제에 이득을 준다. 욕망을 조절하기보다는, 욕망을 자극하고 길들인다. 중요한 것은 이 중독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을 유예시키며, 사회의 리듬에 맞춰 개인을 ‘맞춤화’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반면, 대마초는 이렇게 작용하지 않는다. 생산성을 높이지 않는다. 욕망을 이완시키는 매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특성은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위험 요소로 인식된다. 따라서 대마초 금지의 본질은 노동 시스템을 유지하는 인식 구조 자체에 균열을 가할 위험이 있는 물질로 간주된다.


1920년대 미국의 금주법은 겉보기엔 도덕적 위생운동이었지만, 실은 도시 노동자 통제와 이민자 억압이 목적이었다. 마찬가지로 대마초도 도덕적 패닉, 청소년 보호, 범죄 우려 등의 프레임을 쓰지만, 그 근저에는 다음과 같은 구조가 있다. 체제 유지에 적합하지 않은 의식 상태의 금지와 자기 탐색과 내면적 자유에 대한 제도적 두려움. 탈경쟁, 탈욕망적 태도를 위협으로 인식하는 자본 권력의 반사작용들이 있다.


실제로 FBI와 유엔 등의 보고서에 따르면, 대마초는 폭력적 범죄와의 상관성이 거의 없고, 오히려 공격성과 충동성은 알코올이 훨씬 더 높다.


하지만 대중 인식은 다르다. 왜일까? 범죄 프레임은 통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가장 효율적 수단이다. 이는 20세기 초 미국의 유색인종 탄압, 히피 문화 탄압, 전쟁 반대 세력 억압과도 연결된다. 다시 말해, 대마초는 단지 약물이 아니라, 저항적 정체성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이다.



심지어 실로시빈은 중독성이 없다. WHO도 이를 “비중독성, 낮은 신체 독성, 난치성 우울증, 알코올 등 각종 중독 치료 잠재력이 높은 물질”로 분류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마약류 최상위 스케줄에 속해 있다. 이유는 하나다.


그것은 ‘질문하는 뇌’를 만든다. 종교를 상대화하고, 국가의 정체성을 허물 수 있으며 이윤 체계를 냉철하게 인식할 수 있고 ‘나’라는 정체성조차 사회적 산물임을 경험하게 만든다. 실로시빈은 세계관을 ‘직관적으로 전복시키는 체험’을 제공하며, 이는 어떤 철학책보다도 강력하다. 그래서 위험하다. 그것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체제는 그 자유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에게는 치명적이다.

사고는 소비를 멈추게 하고, 자각은 순종을 흔든다.


술, 담배, 각종 중독은 모두 “자신을 잊게” 만들어준다. 반면 대마초나 실로시빈은 오히려 자신을 너무나도 깊이 자각하게 만든다. 이 질문들은 체제 유지에 치명적인 위험을 품고 있다. 그리하여 위험은 중독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자유에 가까워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자유는 체제 밖의 삶을 상상하게 하고, 욕망을 절제할 수 있게 하며, 생산을 멈출 수 있는 용기를 암시한다.


보통 술, 담배, 설탕, SNS. 자본주의에서 허용된 중독은 즉각적 쾌감과, 복잡한 현실로부터의 회피, 욕망의 강화와 같이 자본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중독 물질이다.


하지만 대마초나 실로시빈은 정반대다. 욕망을 멈추게 하고 자기와 마주보게 하며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라고 묻게 만든다.



자본주의는 중독을 금지하지 않는다. 그 물질이 불러오는 ‘의식 상태’를 금지한다.

대마초와 실로시빈은 개인이 해로운 것이 아니라, 체제에 “의문을 던지게 하므로” 해로운 것이다.


실로시빈은 금지되고, 담배는 판다.

대마초는 통제되고, 술은 장려된다.

자유로운 자아가 아니라, 유순한 중독을 시스템은 원한다.


우리는 약물 금지를 인식 구조와 사회 통제 장치의 역사적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 체제는 눈물은 허용해도 질문은 허용하지 않는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팔로워 141
이전 28화세계는 판단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