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르르 꺄르르.”
그들이 웃을 때, 나는 이미 웃음을 벗어난 지 오래다.
내 웃음은 언제나 반박음이었다.
슬픔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진지함을 가장한 무대 위에서, 나는 웃는다.
그리고 여자들은 말한다.
“너 공감 능력 없는 거 아니야?”
“지금 미친 거 아냐?”
하지만 그건 공감의 부재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상황의 전모를 인식하고, 거기서 감정과 언어 사이의 간극,
사회의 연출과 인간의 진심 사이의 충돌을 본다.
그것이 아이러니이고, 그 아이러니에 나는 웃는다.
유머는 방어기제가 아니다. 고차적 인식이다
사람들은 유머를 흔히 불편함을 숨기려는 방어기제라 말한다.
하지만 내 경우, 유머는 현실의 구조를 벗겨내는 렌즈다.
어떤 사람은 화를 내며 분노하고,
나는 그 분노의 구조에 한 줄기 농담을 던진다.
그 농담은 상황을 무너뜨리고,
그 무너진 틈에서 사람은 웃는다.
비록 잠시지만.
그 웃음은 진심이 아니다.
하지만 진심보다 더 본능적이며,
때로는 폭로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다.
나는 여자를 웃길 수 있다.
그건 자신 있다.
말 몇 마디면, 그녀들은 웃는다.
심지어 화를 낼 때도, 나는 농담을 던진다.
그러면 화는 지속되지만,
그녀들의 눈가엔 웃음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그래, 그건 하나의 기술이자 생존 방식이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남는 감정의 찌꺼기는 오래 남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감정에 공감하지 않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실은 내가 너무 빨리 그 감정을 해체해버렸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감정은 거칠고, 빠르며, 구조적이다.
감정의 조각을 손에 쥐고 그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안에 패턴이 있으면 웃는다.
이것은 내 고유한 방식이다.
이해받기 어렵고, 때로는 배척당하지만,
바로 그 방식이 나를 깊은 생각과 거리두기로 이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젠가 누군가의 진심 앞에서 웃음을 멈춰야 할 순간을 준비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유머는, 때로 침묵으로 감정을 지키는 예의이기도 하니까.